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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가치투자자"
편집자주
칼아이칸,월가의영웅
【편집자주=이 글은 과거에 박정태 기자가 머니투데이 재직(2001년)당시 '월가를 움직이는 100인'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됐던 글입니다. 시간상으로는 오래된 글이지만 월가의 영웅들의 철학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글이라 판단돼 다시 연재하고자 합니다. 시간이 흘러 일부 수치 등은 지난 데이터가 될 수도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박정태 기자는 현재 '굿모닝북스'의 대표이사로 가치투자와 관련된 좋은 책을 발행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부도덕한 기업사냥꾼" "먹이를 찾아 월가를 어슬렁거리는 해적" "냉혹한 협상꾼" "감정이란 찾아볼 수 없는 이익추구자"
칼 아이칸을 수식하는 말은 이처럼 많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아이칸 자신은 스스로를 "가치 투자자(I'm just a value player)"라고 부른다. 저평가된 기업의 주식을 사들여 제 값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투자자들과 달리 그는 한 기업의 주식을 집중 매입해 의결권을 위협할만한 지분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 주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경영진에게 회사를 분할매각 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적대적인 인수합병을 주선하는 역할도 맡는다.
아이칸에게는 사실 투자수익을 올릴 수 없는 주식투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며, 이기는 것이 결국은 최종 목적이다. 아이칸에게 이긴다는 것은 "누가 돈을 갖게 됐느냐(Who got the money)"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갖추지 못한 자신만의 특장점이 있어야 한다. 아이칸에게 그것은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내다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불확실성을 더할 나위없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이칸을 말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1980년대의 텍사코 주식거래는 이같은 그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아이칸이 텍사코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주당 40달러수준에 몇십만주 정도를 매입했다. 텍사코가 보유한 유전의 매장량과 현금자산 등을 감안할 때 분명히 저평가됐다는 판단이었지만 큰 이익을 올릴 만큼 주가가 싸지는 않다는 판단으로 일단 소량의 주식을 사들여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그는 1년 이상을 그렇게 관찰했고, 기회는 찾아왔다.
텍사코가 게티오일의 인수와 관련된 소송에서 펜조일에게 패소해 법원으로부터 112억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텍사코는 곧 이어 파산신청을 냈고, 주가는 급락했다. 이때가 1987년 4월이었다. 몇 달 뒤인 1987년 10월 주가대폭락 사태까지 겹치며 텍사코의 주가는 28달러까지 떨어졌다. 아이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87년 11월까지 600만주를 추가로 사들였다.
아이칸은 또 텍사코의 지분 10%에 해당하는 2,400만주를 보유한 호주의 한 부호로부터 주식을 매입해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는 당시 주가수준인 29달러에 1,200만주를 매입하고, 다음해 1월 나머지 주식 1,200만주도 37달러에 사들였다. 아이칸에게 텍사코의 주식을 매각한 이 부호는 다름아닌 아이칸에게 텍사코 주식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맨 처음 말했던 투자가였다. 그는 아이칸이 텍사코에 대해 잘 알지못하던 무렵 자신이 텍사코 주식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있음을 자랑했지만, 그의 주식매입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이뤄졌다. 결국 주가가 급락하자 그는 다급해져 아이칸에게 주식을 넘긴 셈이었다.
이미 텍사코의 주식 3,000만주 이상을 보유한 아이칸은 곧 텍사코와 펜조일간의 손해배상금 협상 중재에 나서 배상금을 30억달러로 낮춘다. 아이칸의 텍사코 보유주식은 이때 전체 발행주식의 15%에 달하는 4,230만주로 늘어나 있었다. 아이칸은 소송타결이후 자신의 주식매각 협상에 나서 1989년 1월 전체 보유주식을 주당 49달러에 골드만 삭스와 살로먼 브라더스 등에 매각했다. 그는 18개월만에 5억달러이상의 투자수익을 올린 셈이었다.
아이칸의 투자비법은 이처럼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불확실하다는 것 만큼 주가를 과도하게 떨어뜨리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1990년대초 정크본드로 분류되던 RJR 나비스코의 회사채를 사들이고, 지난1995년 이후 이 회사의 주식매입으로 큰 투자수익을 올린 것도 사실은 대중들과 역행하는 불확실성에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지적인 확실성(intellectual certainty)"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각 주정부들이) 담배회사로부터 받을 배상금이 수천억달러에 달하는데 이들이 담배회사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 담배회사는 앞으로도 배상금을 갚아야 할 20년 이상은 계속 영업을 해나갈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이후 아이칸과 같은 저평가주 사냥꾼은 그러나 월가의 주목대상에서 다소 비켜나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벤처케피탈이 이들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고, 주가 수준도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칸에 관한 기사는 지난해부터 다시 심심치않게 등장하고 있다. 물론 과거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이칸은 1998년 이후 붐을 이루며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인터넷 관련주를 1999년부터 공매도하기 시작했다. 공매도란 쉽게 말해 주식을 빌려 매도하는 것으로 주가가 떨어지면 나중에 싼값으로 이를 다시 매입해 차익을 챙길 수 있지만, 주가가 오르게 되면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아이칸은 닷컴 기업들의 수익모델과 현금창출 능력을 감안했을 때 주가급등은 일시적인 거품이며 결국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넷 관련주는 상승을 이어갔고, 지난해 3월 나스닥 지수가 사상최고치를 경신하던 무렵 그는 6,000만달러의 투자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그러나 이때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닷컴주가) 더 오르기를 바랬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주가가 오를수록 닷컴주에 대한 공매도를 늘려갔고, 그는 지난해 하반기 주요 닷컴주가 고점 대비 90%나 떨어지자 엄청난 투자수익을 챙겼다. "나는 확실한 투자에서는 지적인 확실성을 갖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지난해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인 제너럴 모터스(GM)의 주식 매수를 시도했다가 중도에 그만두어야 했다. 이 회사의 전체 발행주식 15%에 해당하는 50억달러 어치의 주식을 매입할 계획이었지만 GM측이 그의 이같은 주식매입 계획을 공표함으로써 그는 그 때까지 매입했던 1,500만달러 어치의 주식을 매각하고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투자성적을 야구선수에 곧잘 비유한다. 3할 대의 타자라면 매우 훌륭한 야구선수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런 선수도 타석에 들어선 10번 중에 6번 이상은 아웃을 당한다. 중요한 것은 10번 중에 3번 이상만 안타를 날려도 스스로 성공한 야구선수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지나면 개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칼 아이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이후 칼 아이칸은 "기업 사냥꾼"의 대명사로 꼽혔다. 그러나 지금 그는 "기업지배권 운동(the corporate governance movement)"의 선봉장으로 불리고 있다.
매 분기별로 공표되는 대차대조표에는 분명히 자산이 부채를 초과했는 데도 막상 부도가 난 뒤에 실사를 하고 보니 자산은 부실자산임이 드러나고, 부외부채가 추가로 발견돼 투자자들의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고마는 일은 미국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이런 일은 얼마되지도 않는 지분을 가진 소위 오너경영주나 능력없는 전문경영인이 기업경영을 제멋대로 했기 때문이다. 대다수 주주의 이익을 무시한 채 분식결산을 하고, 엄청난 임금과 성과급을 챙기는 고위 경영진들에 맞서 대다수 주주들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이칸이 주장하는 기업지배권 운동의 근본 취지다. 진정한 기업 소유주는 다름 아닌 이 기업의 주식에 투자한 주주들이기 때문이다.
아이칸은 스스로 이 운동을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비유한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한 최초의 기본법이고, 기업지배권 운동 역시 주주들의 기본권을 쟁취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모두가 주주들의 권리를 말하고, 뜻도 좋지만 막상 실행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봉건시대와 비슷하다. 평민들은 봉건영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칸은 특히 주식시장의 성장에 따라 이제 거의 대부분의 기업에서 최대주주가 된 기관투자가들이 스스로의 역할을 저버리고 있다고 비난한다. "기관투자가들은 경영진에게 대항할 배짱도 없고, 대안으로 제시할 이사 후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기업개혁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제대로 된 기업을 바라는 게 아니다. 기업은 기관투자가들의 주고객 중 하나고, 더구나 이들 기관투자가들은 기업 경영진과 함께 골프를 치며 접대를 받는다."
이밖에도 경영진들과 맞서 싸우려면 기나긴 소송에 휘말려들 소지도 있다. 여기에는 엄청난 시간과 정력, 비용이 소용되고, 결국 대다수 주주들은 물론 기관투자가들마저 이를 피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칸은 다르다. 그가 주식을 사들이면 기업을 분할 매각하거나 인수합병을 주선하기도 하지만 무능력한 경영진을 교체하고, 최고 경영층의 임금을 깎아내린다. 기업의 수익성을 높여 기업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주주들의 권리를 높이는 길이고, 행동하는 주주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업경영진들은 아이칸이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하면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한다. 또 그를 냉혹한 기업사냥꾼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에서 처음으로 주주권리 운동을 조직화했던 로버트 몽크스조차 그의 행동은 투자자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투자전략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바이런 위언 역시 "아이칸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칸은 1936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왔지만 변호사 활동은 하지않고 유대인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의 부모는 외동아들인 아이칸에게 "과도한 부는 사회악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부모의 가르침보다는 당시 큰 부자였던 외삼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일찌감치 부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학업성적이 뛰어났던 아이칸은 장학금을 받고 프린스턴대학에 진학, 철학을 전공했다. 프린스턴대학으로부터 우수 졸업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그의 학사학위 논문은 경험주의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이론이건 실제 세계에서 증명될 수 없다면 의미없는 것이며, 지식은 관찰한 사실로부터만 나온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사실 이같은 그의 철학이 기업지배권 운동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지 모른다.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의과대학에 진학한 아이칸은 그러나 "피를 다루는 데 염증을 느껴" 그만두고 군예비군으로 복무하게 된다. 훈련소에서 포커를 익힌 그는 블러핑과 남의 패를 읽는 데 뛰어났고, 몇 달간의 복무기간중 4,000달러를 손에 쥐게 된다.
1961년 증권회사인 드레이퍼스에 견습직원으로 들어간 아이칸은 고객들에게 종목추천을 잘해주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1962년 주가폭락으로 그동안 번 돈을 모두 날려버리고 만다. 그는 이때 돈이 하도 궁해 자신의 아파트를 친구들에게 "러브호텔"용으로 빌려줘 임대료를 충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칸은 곧 옵션투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룬탈로 직장을 옮겼고, 1968년에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자신의 회사 Icahn & Co.를 설립한다. 그는 당시 초창기였던 옵션 분야에서 큰 이익을 챙겼고, 뉴욕증권거래소와 아메린카 증권거래소, 장외시장 등 여러 곳에서 거래되는 주식들의 가격차이를 이용해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기업사냥꾼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아이칸은 지난 1990년대를 조용하게 보냈다. 아이칸 자신의 표현대로 "가치투자자"에게는 주가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999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주식시장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다. 주가수익비율이나 장부가치 대비 시가총액 비율, 배당수익률 등을 보면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도나도 뮤추얼 펀드에 돈을 맡긴다. 뭔가 잘못됐고, 계속 그렇게 가고 있다."
그는 1990년대 말 대부분의 기간동안 현금포지션을 최대한으로 가져갔다. 언젠가는 그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의 경고처럼 지난해 하반기 뉴욕 주식시장은 급락했다. 오랜 시간 인내했던 아이칸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올해 65세가 되는 아이칸이지만 그에게는 저평가주를 찾아내 제값으로 만드는 본능과 같은 능력이 있다. 월가는 지금 그의 다음 먹이감이 어느 회사가 될 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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