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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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투자를 믿고 떠난 짧지만 긴 여정
#인터넷이 안겨준 행운
“주식을 도박으로 생각하는 풍토를 바꾸고 싶은데 혼자서 하긴 쉽지 않네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지금 주식투자 동아리에 몸 담고 있는데 들어와서 같이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
2001년 6월 서울대학교 앞 녹두거리의 한 식당에서 당시 학생이었던 나와 김민국 대표가 나눴던 대화의 일부다. 이 날 대화에는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목에 대한 얘기, 투자 문화에 관한 얘기, 가치투자 방법론에 관한 얘기가 오고 갔다. 당시에는 이 작은 회합이 짧지만 긴 여정의 시작임을 알지 못했다.
당시 뉴아이라는 가치투자자들이 모이는 사이트가 있었다. 여기서 ‘낭중지추k’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이 올린 웅진코웨이, 한섬, 신도리코, 롯데삼강 등의 레포트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나도 벌써 투자 경력 6년 차에 접어든 데다가 가치투자 마인드를 닦아 놓았다고 자부하던 때였는데도 그 글들은 나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 즉시 메일을 보냈고 답장이 몇 번 오간 후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성명을 하다 보니 학교도 같았고 나이도 같았다. 투자경력이 오래된 아저씨를 상상했었는데 뜻밖이었다. 기막힌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 앞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해 소위 ‘번개’가 성사되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얘기한 학교 앞 회합이었다.
누군가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행복해졌는가?”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다”고 말할 뿐 아니라 “고맙다”라는 말까지 덧붙일 수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의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까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나는 주식에 미쳐 학교를 잘 나가지 않았던 외골수이자 불량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우리가 가치투자를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VIP펀드 항해를 시작하다
그 해 여름 같이 일을 도모해보자는 김 대표의 적극적인 권유로 주식투자 동아리 SMIC(현 서울대투자연구회)에 가입했다. 학내에서 주식투자 동아리의 위상은 매우 약했다. 신성한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무슨 돈벌이 연구냐는 공격을 받기 일쑤였고 제대로 된 방 조차 없었다. 투자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주식투자는 기업에 대한 투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팍스넷에 간간이 기업분석 글을 올렸는데 그런 종목이 어떻게 오르느냐부터 시작해서 학생은 공부나 해라는 리플이 많이 달리기도 했다. 안팎으로 편견에 시달리던 때였다.
<동아리 회원들과 찍은 신문 기사 사진>
뒷줄 좌로부터 최준철, 김민국, 박민우
이 시기의 유일한 낙은 김 대표를 포함해서 동아리 내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식당과 하숙집을 전전하며 가치투자와 관심 있는 기업에 대해서 탁 터놓고 맘껏 수다를 떠는 일이었다. 실제 이 시기에 가치투자와 기업분석에 관한 생각들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이때 혼자 투자를 할 때와 여럿이 함께 할 때는 결과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치투자자의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꿈은 아마 이때서부터 마음 속에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가치투자의 유용성이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당시에는 ‘그건 미국에서나 되지 우리나라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치투자를 공격하는 가장 큰 논리였다. 여러 증권정보 사이트에 간헐적으로 올리던 기업분석 레포트만으로는 가치투자를 증명하는데 한계가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표의 아이디어로 출범했던 것이 미디어를 꽤 자주 타기도 했고 VIP투자자문의 모태 역할을 한 VIP펀드다.
'가치투자의 개척자'(Value Investment Pioneer)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붙이고 동아리 회원들의 자금을 모아 2001년 7월 야심차게 그 닻을 올렸다. 사실 이름만 펀드였을 뿐 규모도 작아 신뢰도를 획득하기가 힘들어보였다. 그래서 ‘가치투자를 증명하기 위한 공개포트폴리오’로 정의하고 동아리 사이트에 매월 포트폴리오 내역, 수익률, 운용보고서 등을 공개했다. 규모가 안 된다면 투명성으로 승부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동아리 홈페이지도 근사하게 개편했다.
시련은 금새 찾아왔다. VIP펀드를 출범하고 2개월 후 9.11 사태가 터졌다. 주식을 50% 정도 채워놓은 상태에서 폭락을 맞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됐다. 이때 김 대표와 긴급 회동을 해서 모든 남은 현금을 동원해 평소 눈 여겨 봐둔 종목을 사들였다. 돌아보면 좋은 종목을 싸게 사들일 수 있었던 정확한 결정이었으나 3차 세계대전 얘기까지 나오던 당시 분위기로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다. 투명하게 공개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종목 선택에 신중함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2년 뒤인 2003년 7월 펀드를 청산할 때 117%의 수익률로 마감할 수 있었다. 년 단위로 한 번도 마이너스 수익률을 내지 않고 꾸준히 수익을 쌓아가며 복리수익률을 향유한 덕분이었다. 같은 기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15%에 불과했다. 정식 펀드는 아니었지만 매월 공개를 한 탓인지 나름대로 가치투자를 실증했다는 신뢰도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후일 투자자문사의 이름을 지을 때 많은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VIP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2년 동안 함께 해온 VIP펀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VIP펀드는 나와 김 대표가 흘린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자 자식 같은 존재였다.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의 탄생
2001년 11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아직 가치투자에 관한 국내서가 없으니 그동안 축적된 자료와 생각들을 바탕으로 가치투자 서적을 출간하자는 것이었다. 최소한 팔리지 않더라도 동아리 교육용 자료로라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김 대표와 학교식당에서 3시간에 걸쳐 구상한 대략의 목차를 가지고 무작정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원서를 던져주며 번역을 해서 통과하면 번역서는 출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곳도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무슨 주식책 집필이냐는 투였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 ‘투자의 거장들’을 출간했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원고를 가져오면 출간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미 여러 출판사를 다니며 현실을 알고 나자 오기가 생겼다.
당시 집필은 나와 김 대표 그리고 후배였던 박민우 군(나중에 교육 사업체의 사장이 되었다)이 맡기로 했었는데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아는 선배에게 부탁해 사무실 한 켠을 얻어 합숙에 들어갔다.
2개월 동안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보지 못한 강행군이었다. 책을 처음 써보는데다가 출판사에서 거절 못할 정도로 포맷까지 완벽을 기하자는 욕심까지 더해져 작업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동아리 후배 교육까지 진행하고 중간중간 새로운 레포트도 써서 올렸으니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그동안 쌓아뒀던 자료를 추리고 이를 바탕으로 회의하고 담당 부분을 나눠서 집필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돈도 넉넉치 않아 내내 햄버거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모두 다 퇴근하고 난 한밤 중에 눈치를 봐가며 프린터를 돌렸다. 햄버거를 얼마나 먹었는지 2달 만에 누적 포인트로 치킨 너겟 빅 사이즈를 공짜로 먹기도 했다.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똑 같이 다시 해보라고 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꼬리를 내릴 정도로 무엇인가에 홀린 듯 책을 써나갔다.
노력을 기울인 탓인지 수십 차례 검토를 하고도 개강하기 전에 책 집필을 완료할 수 있었고 내용도 만족스러웠다. 출판사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일단 내용이 쉽게 전달된다는 점에 많은 점수를 받았다. 제목이 끝까지 난제였으나 무난하게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이라고 정했다. 그동안 나왔던 가치투자 관련 해외 번역서와는 다르게 한국 기업의 사례를 들어 우리 풍토에 맞게 가치투자를 재적용 했다는 뜻을 드러내고 싶었고 ‘가치투자’라는 단어를 선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저자의 인지도 부족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9쇄를 찍었는데도 꾸준히 팔리며 증권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어 생명력이 긴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집필 전의 희망은 일단 이뤄진 셈이다.(2004년에 개정판을 냈다) 사실상 이 책이 본격적인 외부 활동의 길을 열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보다는 가치투자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동아리의 위상을 안팎으로 크게 높일 수 있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 초판>
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책을 집필하기 전에 유일전자라는 회사를 발굴해 기업분석 레포트를 발표하고 책의 사례로까지 실었다. 유일전자가 지금이야 인기 종목이지만 당시에는 등록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레포트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상당히 비인기 종목이었다. 주가도 6000원 정도로 매우 쌌는데 결국 주가가 1년 만에 3배 이상 올라서 나를 흐뭇하게 했던 종목이다.
그런데 책 집필을 마쳤을 때 유일전자의 박병채 전무(현 대표이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당시 주가가 가치에 비해 워낙 낮아 답답하던 차에 우연히 내가 쓴 레포트를 봤는데 너무 고마워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레포트여서 그랬나 보다. 이때 회사 내용에 대해 더 알려주고 구석구석 공장 견학을 시켜줬는데 사실상 제대로 된 첫 기업탐방이었다. 지금이야 기관투자가라 탐방 다니기가 쉽지만 당시에는 아이쇼핑 하러 온 까다로운 학생 고객 대접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을 배려했던 박병채 전무의 환대는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이후 유일전자가 시가총액 3600억원의 대표 IT부품회사로 발돋움 했으니 기쁨은 더하다. 가치투자를 통한 기쁨은 그로 인해 얻는 수익 이상이 아닐까?
#가치투자 전문지를 창간하다
책 작업을 끝내자마자 또 욕심이 생겼다. 책과 웹사이트 뿐 아니라 신문 형태로 매월 가치투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 가치투자 저변이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서울대투자연구회로 개명한 동아리의 인지도가 낮아 학내에서 이름을 좀 알려보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래서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 3인방이 다시 모여 가치투자 전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신문 만드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상태다 보니 익숙한 파워포인트로 조판을 짜고 학교 앞 인쇄소에 맡겨 복사용지로 1000부를 찍기로 했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선배들을 찾아 다니며 읍소해 제작비를 겨우 맞췄다. 배포는 물론 직접 발로 뛰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나중에 대학투자저널, 대학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꾼 서울대투자저널이었다. 하지만 말이 신문이었지 조악한 인쇄 품질에 8면에 불과했다.
<서울대 투자저널>
그런데 1호는 어찌어찌해서 냈는데 서울대가 아니라 다른 대학으로도 배포 범위를 넓힐 욕심에 대학투자저널로 이름을 바꾼 2호부터가 문제였다. 우선 신문답게 만드는 게 관건이었고 그에 걸 맞는 비용을 지출해야만 했다. 일단 동아리에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인방이 떠맡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3월에 출간된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이 잘 팔려 인세가 들어왔다. 이렇게 마련된 인세는 모두 신문 제작 비용에 들어갔다. 돈을 좀 투입하고 저렴한 비용의 제작소를 알아봐 공을 들였더니 신문이 갈수록 그럴 듯 해졌다. 이때 평소 알고 지내던 일간스포츠의 임상훈 기자가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이 방법도 한계가 있어 늘어나는 신문 제작 비용을 대기 위해 팔자에 없는 광고 영업을 다니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며 신문을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기사를 써야 했고 이를 취합해 디자이너에게 넘기고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다가 CD를 받아서 인쇄소에 넘기고 신문을 받아 직접 뿌리러 다니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중 광고 영업이 가장 힘들었다. 쇼핑백에 신문을 잔뜩 담아다가 여의도 증권사 홍보실들을 무작정 찾아갔다. 문전박대 당하기도 일쑤였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광고를 줄 수 있다는 말에 나이트클럽까지 찾아갔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다급했었다.
다행히 몇 군데 증권사와 기업에서 도움을 줘 겨우 신문을 꾸려갈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증권사에서 쇼핑백을 들고 문가를 서성거리고 있는 우리를 보면 한 달이 지났구나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만난 일부 홍보실 직원들과의 인연도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02년 7월에는 눈치밥을 먹던 선배 사무실에서 나와 낙성대에 조그만 오피스텔을 얻었다. 책상 의자를 밀어넣으면 나와 김 대표가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올 정도로 좁았고 가구는 모두 중고품을 썼지만 우리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흐뭇했다. 여름에는 버틸 만 했는데 가을부터는 추워져서 이불이 필요했다. 5만원짜리 이불을 사는데 김 대표와 이틀을 고민했을 정도로 신문 제작을 위해 모든 것을 아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개인 비용도 줄이기 위해 자취집에서 나와 김 대표와 아예 사무실에 거주했다. 세탁기도 없어 손 빨래를 해 랜 케이블에 걸어 말려야 할 정도로 열악했지만 편안함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당장 다음 호 신문을 찍을 수 있을지, 사무실 비용을 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피스텔 내부>
#아이투자를 오픈하다
같은 해 8월에 컴퓨터를 잘 하는 동아리 후배를 영입해 대학투자저널 사이트인 아이투자(itooza.com)를 제작, 오픈했다. 지금은 아이투자가 많은 회원들로 북적거리지만 그때는 기사만 달랑 걸려 있었던 초라한 모습이었다. 글이 하나라도 올라오면 신기해서 답글을 막 달 정도로 커뮤니티도 한산했다.
아이투자 오픈에 맞춰 경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아이투자의 킬러 컨텐츠였던 VIP펀드의 운용 내역을 유료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전에도 신문을 도와달라는 차원에서 1년 구독비 10만원을 받았으나 대학가에 공짜로 뿌리다 보니 별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큰 결단으로 독자의 호응을 이끌어 낼 필요가 있었다.
무료로 제공되던 VIP펀드 운용 내역이 유료가 되자 예상대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출사표를 올려 솔직한 심정으로 취지를 전달하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취지에 동참하는 많은 회원들의 구독 문의가 쇄도했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지금은 대학경제신문이 VIP투자자문과는 별개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때 아이투자를 도와준 많은 초창기 회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기사 회의 모습>
정기구독자가 늘어나자 책임감이 더 생겨 레포트 하나라도 심혈을 기울였고 다양한 컨텐츠를 쉽게 전달하고자 매일 기사 회의를 거듭했다. 정기구독자가 많아져 매월 신문을 우편으로 발송하는 것도 큰 일이 되었다. 돈이 없다 보니 봉투에 신문을 넣고 일일이 주소를 손으로 적었다. 발송 작업을 한번 하고 나면 팔이 빠지는 것 같았지만 덕분에 초창기 회원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었다.
이때는 꿈이 참 소박했다. 사이트를 제대로 관리해줄 웹마스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발송을 아웃소싱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포트를 많이 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등교에 대한 부담 없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주말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어렵긴 했지만 지금도 가장 기억이 많이 나는 시간이었다.
#법인 출범 그리고 더밸류 사모펀드
좁디 좁은 사무실 바닥에 누워 잠이 오지 않을 때 김 대표와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우리가 정말 5000만원짜리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창기에 느껴봤을 희망사항이겠지만 내 회사에서 월급 한번 받아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좋은 조건으로 제도권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지만 고민 끝에 아무리 적수공권이지만 그건 우리가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우선 제도권에서 회사의 방향과 상관없이 우리의 투자 철학을 지킬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주식이 비싸면 펀드로 돈이 들어오고 주식이 싸지면 돈이 나가는 속성도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결국 졸업 때까지 지금까지 해온 일을 계속 하다 보면 길이 열릴 거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4학년 전공 수업으로 조동성 교수님(당시 경영대학장)의 전략경영 수업을 들었는데 팀별로 창업 아이템을 정하고 벤처캐피탈리스트 앞에서 발표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3인방이 다시 모여 지금까지 구상한 사업 모델을 발표해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나섰다. 사업 모델은 지주회사, 영업 부문 아이템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학투자저널이었다. 누드 교과서로 유명한 이투스그룹이 이 수업의 발표를 통해 창업의 기회를 잡았다는 점이 우리를 동기 부여 시켰다.
노력의 결과였는지 발표에서 1등을 차지했고 조동성 교수님과 면담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때 대학투자저널이라는 개인사업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들에게 법인 설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때서부터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자본금을 모았다. 그래서 설립 목적 자체가 지주회사인 ‘더밸류앤코(The Value & Co)’를 2003년 1월에 출범시켰다. 우리가 추구하는 ‘밸류’라는 단어와 함께 회사들을 거느린다는 의미의 ‘& Company’의 약자를 사명으로 정했다. 목표는 물론 한국의 버크셔 헤서웨이였다.
더밸류앤코를 통해 세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첫 번째는 기존 사업부인 대학투자저널, 두 번째는 가치투자 관련 출판, 세 번째는 우리의 핵심 역량인 투자 부문이었다. 후일 대학투자저널은 대학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머니&밸류’로, 출판은 ‘이콘출판’으로, 투자 부문은 ‘VIP투자자문’으로 독립해 더밸류앤코는 애초의 목표대로 지주회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얘기가 더밸류앤코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부각시켰으며 VIP투자자문 설립의 단초가 되었던 ‘더밸류 사모펀드’다. VIP펀드가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정식 펀드가 아니고 규모가 작다는 한계를 느끼던 터였다. 그러나 펀드를 만들기 위해 자산운용사나 투신사를 만들기에는 자본금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사모펀드였다.
당시 간접자산운용법에서는 공모펀드의 운용 주체를 자산운용사와 투신사로 정해놓았을 뿐 사모펀드의 운용 주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도 해보지 않았을 뿐 개인이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미쳐 법률적 검토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사무수탁팀이 있는 증권예탁원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증권예탁원 사무수탁팀에서는 한번 해보자는 의사 표시를 해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펀드 설립에 착수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운 좋게도 더밸류 사모펀드는 국내 최초로 개인이 운용주체가 되는 사모펀드로 금감원의 인가를 득할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의 꿈인 공식적인 펀드가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100억원의 펀드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뜻하지 않게 뜨거운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이후 우리의 사례를 보고 사모펀드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많은 문의를 해왔지만 아쉽게도 더밸류 사모펀드는 개인이 운용주체가 되는 마지막 펀드로 남게 되었다. 간접자산운용법이 개정되면서 사모펀드의 규정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2003년 7월에 출범한 더밸류 사모펀드는 현재 VIP투자자문의 대표 포트폴리오이자 공식적인 수익률로 자리잡았고 1년 7개월 누적 수익률 76%를 기록하고 있어 가치투자를 증명하겠다는 VIP펀드의 당초 취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더밸류 사모펀드 수익률 그래프>
#뜻밖에 찾아온 투자자문 설립의 기회
사모펀드는 공개 포트폴리오가 아닌 진짜 펀드 형태로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더밸류앤코가 금융 사업을 하는 것은 사모펀드가 좋은 성과를 내는 시점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모펀드 설립이 뉴스를 타자 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해왔고 특히 아이투자 회원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뢰를 보내주고 있었구나 하는 기쁨이 교차했다. 금융사를 만들면 과연 몇 명이나 우리를 믿고 가입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모펀드로는 여러 투자자들과 함께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사모펀드는 투자자 수가 50인 미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입 의사를 밝힌 투자자들에게 일일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사모펀드로는 한계가 있으니 투자자문사를 만들어 함께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라는 말을 전하고 애초에 가졌던 스케쥴을 앞당겨 투자자문 설립을 서둘렀다. 이렇게 탄생한 회사가 국내 최초의 학생 금융 벤처 ‘VIP투자자문’이다. 투자자문 설립 직후 졸업을 해서 일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절묘한 타이밍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시간을 투자에만 썼으면 좋겠다는 나의 개인적 꿈이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투자자문 설립이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그동안 했던 어떤 일보다 힘들었지만 우리 철학을 펼칠 수 있는 가치투자에 기반한 금융사를 설립한다는 생각에 끈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이 있어 행운이었다. 현업에 있는 분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었고 아이투자 회원 중 일부가 투자자문 설립을 위한 인력 채용에 응해줬다. 조언을 해준 분들은 지금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고 인력 채용에 응해준 사람들 중 합격자들은 현재 VIP투자자문의 운용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VIP투자자문의 초기 고객들은 아이투자 회원과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의 독자들이었다. 3년 운용의 까다로운 조건이었고 아무 레코드도 없는 상태였지만 흔쾌히 소중한 자금을 맡겨줬다. 심지어 투자 예정 기간에 30년이라고 적어 넣는 분도 있었다. 이 분들은 우리가 투자자문 설립 후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다행히 이 분들에게 50~60%의 수익률을 돌려드릴 수 있었다. 자기 자금으로 투자를 할 때보다 부담이 더 되는 건 사실이지만 고객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희열은 자기 자금 운용으로 얻는 수익의 이상임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이제 VIP투자자문은 600억원을 운용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VIP투자자문은 아직 진행형이고 할 일이 많이 남아있지만 최소한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VIP투자자문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고객이 투자원칙을 이해하고 믿어주는 행복하고 복 받은 회사라고 말이다.
#VIP투자자문의 미래
지난 4년을 돌아보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치투자 하나 믿고 덜렁 떠난 여정이 참으로 길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대한 편견, 주식투자에 대한 오해, 가치투자에 대한 불신, 현실적인 난관 등 잠을 못 이룰 정도의 숱한 장애물들을 만났지만 가치투자에 대한 믿음과 우리를 믿어주고 응원해준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VIP투자자문이 있을 수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시작한 탓에 대학의 낭만과 추억,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 등을 포기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런 빈 공간이 하고 싶었던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는 기쁨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VIP투자자문이 어떤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발전해나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투자문화를 건전하게 바꾸고 가치투자를 통해 고객을 정직한 부자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바라보고 꾸준히 매진한다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만은 확고하다.
마지막으로 금융 창업을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이 있다. 많은 예비 창업가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투자자문사를 설립할 수 있느냐는 메일을 자주 받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 본질보다는 절차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절차는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우리는 단 한번도 투자자문사를 목표로 해본 적이 없다. 가치투자를 알리고 싶었기에 책과 신문을 만들었고, 신문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개인사업자로 등록했고, 가치투자를 증명하고 싶었기에 사모펀드와 투자자문사가 필요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일을 하고 싶은지, 비전이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모든 사업이 그렇겠지만 특히 금융에서는 신뢰가 생명이다. 즉 더밸류 사모펀드는 신뢰를 모은 펀드이고 VIP투자자문은 신뢰를 바탕으로 출발한 금융회사이지 돈을 모았던 것이 아니다. 고객을 상대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VIP투자자문을 찾는 고객은 신뢰를 맡기러 오는 것이지 돈을 맡기러 오지 않는다.
미래의 금융시장을 이끌어갈 대학생들이 이런 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낸다면 제2의 VIP투자자문 아니 한국의 버크셔 헤서웨이가 탄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VIP투자자문 대표이사 최준철
wallstreet@viptooza.com
“주식을 도박으로 생각하는 풍토를 바꾸고 싶은데 혼자서 하긴 쉽지 않네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지금 주식투자 동아리에 몸 담고 있는데 들어와서 같이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
2001년 6월 서울대학교 앞 녹두거리의 한 식당에서 당시 학생이었던 나와 김민국 대표가 나눴던 대화의 일부다. 이 날 대화에는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목에 대한 얘기, 투자 문화에 관한 얘기, 가치투자 방법론에 관한 얘기가 오고 갔다. 당시에는 이 작은 회합이 짧지만 긴 여정의 시작임을 알지 못했다.
당시 뉴아이라는 가치투자자들이 모이는 사이트가 있었다. 여기서 ‘낭중지추k’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이 올린 웅진코웨이, 한섬, 신도리코, 롯데삼강 등의 레포트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나도 벌써 투자 경력 6년 차에 접어든 데다가 가치투자 마인드를 닦아 놓았다고 자부하던 때였는데도 그 글들은 나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 즉시 메일을 보냈고 답장이 몇 번 오간 후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성명을 하다 보니 학교도 같았고 나이도 같았다. 투자경력이 오래된 아저씨를 상상했었는데 뜻밖이었다. 기막힌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 앞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해 소위 ‘번개’가 성사되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얘기한 학교 앞 회합이었다.
누군가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행복해졌는가?”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다”고 말할 뿐 아니라 “고맙다”라는 말까지 덧붙일 수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의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까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나는 주식에 미쳐 학교를 잘 나가지 않았던 외골수이자 불량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우리가 가치투자를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VIP펀드 항해를 시작하다
그 해 여름 같이 일을 도모해보자는 김 대표의 적극적인 권유로 주식투자 동아리 SMIC(현 서울대투자연구회)에 가입했다. 학내에서 주식투자 동아리의 위상은 매우 약했다. 신성한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무슨 돈벌이 연구냐는 공격을 받기 일쑤였고 제대로 된 방 조차 없었다. 투자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주식투자는 기업에 대한 투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팍스넷에 간간이 기업분석 글을 올렸는데 그런 종목이 어떻게 오르느냐부터 시작해서 학생은 공부나 해라는 리플이 많이 달리기도 했다. 안팎으로 편견에 시달리던 때였다.
<동아리 회원들과 찍은 신문 기사 사진>
뒷줄 좌로부터 최준철, 김민국, 박민우
이 시기의 유일한 낙은 김 대표를 포함해서 동아리 내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식당과 하숙집을 전전하며 가치투자와 관심 있는 기업에 대해서 탁 터놓고 맘껏 수다를 떠는 일이었다. 실제 이 시기에 가치투자와 기업분석에 관한 생각들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이때 혼자 투자를 할 때와 여럿이 함께 할 때는 결과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치투자자의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꿈은 아마 이때서부터 마음 속에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가치투자의 유용성이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당시에는 ‘그건 미국에서나 되지 우리나라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치투자를 공격하는 가장 큰 논리였다. 여러 증권정보 사이트에 간헐적으로 올리던 기업분석 레포트만으로는 가치투자를 증명하는데 한계가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표의 아이디어로 출범했던 것이 미디어를 꽤 자주 타기도 했고 VIP투자자문의 모태 역할을 한 VIP펀드다.
'가치투자의 개척자'(Value Investment Pioneer)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붙이고 동아리 회원들의 자금을 모아 2001년 7월 야심차게 그 닻을 올렸다. 사실 이름만 펀드였을 뿐 규모도 작아 신뢰도를 획득하기가 힘들어보였다. 그래서 ‘가치투자를 증명하기 위한 공개포트폴리오’로 정의하고 동아리 사이트에 매월 포트폴리오 내역, 수익률, 운용보고서 등을 공개했다. 규모가 안 된다면 투명성으로 승부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동아리 홈페이지도 근사하게 개편했다.
시련은 금새 찾아왔다. VIP펀드를 출범하고 2개월 후 9.11 사태가 터졌다. 주식을 50% 정도 채워놓은 상태에서 폭락을 맞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됐다. 이때 김 대표와 긴급 회동을 해서 모든 남은 현금을 동원해 평소 눈 여겨 봐둔 종목을 사들였다. 돌아보면 좋은 종목을 싸게 사들일 수 있었던 정확한 결정이었으나 3차 세계대전 얘기까지 나오던 당시 분위기로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다. 투명하게 공개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종목 선택에 신중함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2년 뒤인 2003년 7월 펀드를 청산할 때 117%의 수익률로 마감할 수 있었다. 년 단위로 한 번도 마이너스 수익률을 내지 않고 꾸준히 수익을 쌓아가며 복리수익률을 향유한 덕분이었다. 같은 기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15%에 불과했다. 정식 펀드는 아니었지만 매월 공개를 한 탓인지 나름대로 가치투자를 실증했다는 신뢰도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후일 투자자문사의 이름을 지을 때 많은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VIP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2년 동안 함께 해온 VIP펀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VIP펀드는 나와 김 대표가 흘린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자 자식 같은 존재였다.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의 탄생
2001년 11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아직 가치투자에 관한 국내서가 없으니 그동안 축적된 자료와 생각들을 바탕으로 가치투자 서적을 출간하자는 것이었다. 최소한 팔리지 않더라도 동아리 교육용 자료로라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김 대표와 학교식당에서 3시간에 걸쳐 구상한 대략의 목차를 가지고 무작정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원서를 던져주며 번역을 해서 통과하면 번역서는 출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곳도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무슨 주식책 집필이냐는 투였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 ‘투자의 거장들’을 출간했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원고를 가져오면 출간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미 여러 출판사를 다니며 현실을 알고 나자 오기가 생겼다.
당시 집필은 나와 김 대표 그리고 후배였던 박민우 군(나중에 교육 사업체의 사장이 되었다)이 맡기로 했었는데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아는 선배에게 부탁해 사무실 한 켠을 얻어 합숙에 들어갔다.
2개월 동안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보지 못한 강행군이었다. 책을 처음 써보는데다가 출판사에서 거절 못할 정도로 포맷까지 완벽을 기하자는 욕심까지 더해져 작업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동아리 후배 교육까지 진행하고 중간중간 새로운 레포트도 써서 올렸으니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그동안 쌓아뒀던 자료를 추리고 이를 바탕으로 회의하고 담당 부분을 나눠서 집필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돈도 넉넉치 않아 내내 햄버거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모두 다 퇴근하고 난 한밤 중에 눈치를 봐가며 프린터를 돌렸다. 햄버거를 얼마나 먹었는지 2달 만에 누적 포인트로 치킨 너겟 빅 사이즈를 공짜로 먹기도 했다.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똑 같이 다시 해보라고 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꼬리를 내릴 정도로 무엇인가에 홀린 듯 책을 써나갔다.
노력을 기울인 탓인지 수십 차례 검토를 하고도 개강하기 전에 책 집필을 완료할 수 있었고 내용도 만족스러웠다. 출판사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일단 내용이 쉽게 전달된다는 점에 많은 점수를 받았다. 제목이 끝까지 난제였으나 무난하게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이라고 정했다. 그동안 나왔던 가치투자 관련 해외 번역서와는 다르게 한국 기업의 사례를 들어 우리 풍토에 맞게 가치투자를 재적용 했다는 뜻을 드러내고 싶었고 ‘가치투자’라는 단어를 선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저자의 인지도 부족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9쇄를 찍었는데도 꾸준히 팔리며 증권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어 생명력이 긴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집필 전의 희망은 일단 이뤄진 셈이다.(2004년에 개정판을 냈다) 사실상 이 책이 본격적인 외부 활동의 길을 열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보다는 가치투자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동아리의 위상을 안팎으로 크게 높일 수 있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 초판>
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책을 집필하기 전에 유일전자라는 회사를 발굴해 기업분석 레포트를 발표하고 책의 사례로까지 실었다. 유일전자가 지금이야 인기 종목이지만 당시에는 등록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레포트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상당히 비인기 종목이었다. 주가도 6000원 정도로 매우 쌌는데 결국 주가가 1년 만에 3배 이상 올라서 나를 흐뭇하게 했던 종목이다.
그런데 책 집필을 마쳤을 때 유일전자의 박병채 전무(현 대표이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당시 주가가 가치에 비해 워낙 낮아 답답하던 차에 우연히 내가 쓴 레포트를 봤는데 너무 고마워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레포트여서 그랬나 보다. 이때 회사 내용에 대해 더 알려주고 구석구석 공장 견학을 시켜줬는데 사실상 제대로 된 첫 기업탐방이었다. 지금이야 기관투자가라 탐방 다니기가 쉽지만 당시에는 아이쇼핑 하러 온 까다로운 학생 고객 대접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을 배려했던 박병채 전무의 환대는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이후 유일전자가 시가총액 3600억원의 대표 IT부품회사로 발돋움 했으니 기쁨은 더하다. 가치투자를 통한 기쁨은 그로 인해 얻는 수익 이상이 아닐까?
#가치투자 전문지를 창간하다
책 작업을 끝내자마자 또 욕심이 생겼다. 책과 웹사이트 뿐 아니라 신문 형태로 매월 가치투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 가치투자 저변이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서울대투자연구회로 개명한 동아리의 인지도가 낮아 학내에서 이름을 좀 알려보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래서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 3인방이 다시 모여 가치투자 전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신문 만드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상태다 보니 익숙한 파워포인트로 조판을 짜고 학교 앞 인쇄소에 맡겨 복사용지로 1000부를 찍기로 했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선배들을 찾아 다니며 읍소해 제작비를 겨우 맞췄다. 배포는 물론 직접 발로 뛰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나중에 대학투자저널, 대학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꾼 서울대투자저널이었다. 하지만 말이 신문이었지 조악한 인쇄 품질에 8면에 불과했다.
<서울대 투자저널>
그런데 1호는 어찌어찌해서 냈는데 서울대가 아니라 다른 대학으로도 배포 범위를 넓힐 욕심에 대학투자저널로 이름을 바꾼 2호부터가 문제였다. 우선 신문답게 만드는 게 관건이었고 그에 걸 맞는 비용을 지출해야만 했다. 일단 동아리에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인방이 떠맡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3월에 출간된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이 잘 팔려 인세가 들어왔다. 이렇게 마련된 인세는 모두 신문 제작 비용에 들어갔다. 돈을 좀 투입하고 저렴한 비용의 제작소를 알아봐 공을 들였더니 신문이 갈수록 그럴 듯 해졌다. 이때 평소 알고 지내던 일간스포츠의 임상훈 기자가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이 방법도 한계가 있어 늘어나는 신문 제작 비용을 대기 위해 팔자에 없는 광고 영업을 다니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며 신문을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기사를 써야 했고 이를 취합해 디자이너에게 넘기고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다가 CD를 받아서 인쇄소에 넘기고 신문을 받아 직접 뿌리러 다니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중 광고 영업이 가장 힘들었다. 쇼핑백에 신문을 잔뜩 담아다가 여의도 증권사 홍보실들을 무작정 찾아갔다. 문전박대 당하기도 일쑤였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광고를 줄 수 있다는 말에 나이트클럽까지 찾아갔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다급했었다.
다행히 몇 군데 증권사와 기업에서 도움을 줘 겨우 신문을 꾸려갈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증권사에서 쇼핑백을 들고 문가를 서성거리고 있는 우리를 보면 한 달이 지났구나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만난 일부 홍보실 직원들과의 인연도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02년 7월에는 눈치밥을 먹던 선배 사무실에서 나와 낙성대에 조그만 오피스텔을 얻었다. 책상 의자를 밀어넣으면 나와 김 대표가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올 정도로 좁았고 가구는 모두 중고품을 썼지만 우리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흐뭇했다. 여름에는 버틸 만 했는데 가을부터는 추워져서 이불이 필요했다. 5만원짜리 이불을 사는데 김 대표와 이틀을 고민했을 정도로 신문 제작을 위해 모든 것을 아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개인 비용도 줄이기 위해 자취집에서 나와 김 대표와 아예 사무실에 거주했다. 세탁기도 없어 손 빨래를 해 랜 케이블에 걸어 말려야 할 정도로 열악했지만 편안함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당장 다음 호 신문을 찍을 수 있을지, 사무실 비용을 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피스텔 내부>
#아이투자를 오픈하다
같은 해 8월에 컴퓨터를 잘 하는 동아리 후배를 영입해 대학투자저널 사이트인 아이투자(itooza.com)를 제작, 오픈했다. 지금은 아이투자가 많은 회원들로 북적거리지만 그때는 기사만 달랑 걸려 있었던 초라한 모습이었다. 글이 하나라도 올라오면 신기해서 답글을 막 달 정도로 커뮤니티도 한산했다.
아이투자 오픈에 맞춰 경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아이투자의 킬러 컨텐츠였던 VIP펀드의 운용 내역을 유료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전에도 신문을 도와달라는 차원에서 1년 구독비 10만원을 받았으나 대학가에 공짜로 뿌리다 보니 별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큰 결단으로 독자의 호응을 이끌어 낼 필요가 있었다.
무료로 제공되던 VIP펀드 운용 내역이 유료가 되자 예상대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출사표를 올려 솔직한 심정으로 취지를 전달하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취지에 동참하는 많은 회원들의 구독 문의가 쇄도했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지금은 대학경제신문이 VIP투자자문과는 별개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때 아이투자를 도와준 많은 초창기 회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기사 회의 모습>
정기구독자가 늘어나자 책임감이 더 생겨 레포트 하나라도 심혈을 기울였고 다양한 컨텐츠를 쉽게 전달하고자 매일 기사 회의를 거듭했다. 정기구독자가 많아져 매월 신문을 우편으로 발송하는 것도 큰 일이 되었다. 돈이 없다 보니 봉투에 신문을 넣고 일일이 주소를 손으로 적었다. 발송 작업을 한번 하고 나면 팔이 빠지는 것 같았지만 덕분에 초창기 회원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었다.
이때는 꿈이 참 소박했다. 사이트를 제대로 관리해줄 웹마스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발송을 아웃소싱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포트를 많이 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등교에 대한 부담 없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주말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어렵긴 했지만 지금도 가장 기억이 많이 나는 시간이었다.
#법인 출범 그리고 더밸류 사모펀드
좁디 좁은 사무실 바닥에 누워 잠이 오지 않을 때 김 대표와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우리가 정말 5000만원짜리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창기에 느껴봤을 희망사항이겠지만 내 회사에서 월급 한번 받아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좋은 조건으로 제도권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지만 고민 끝에 아무리 적수공권이지만 그건 우리가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우선 제도권에서 회사의 방향과 상관없이 우리의 투자 철학을 지킬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주식이 비싸면 펀드로 돈이 들어오고 주식이 싸지면 돈이 나가는 속성도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결국 졸업 때까지 지금까지 해온 일을 계속 하다 보면 길이 열릴 거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4학년 전공 수업으로 조동성 교수님(당시 경영대학장)의 전략경영 수업을 들었는데 팀별로 창업 아이템을 정하고 벤처캐피탈리스트 앞에서 발표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3인방이 다시 모여 지금까지 구상한 사업 모델을 발표해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나섰다. 사업 모델은 지주회사, 영업 부문 아이템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학투자저널이었다. 누드 교과서로 유명한 이투스그룹이 이 수업의 발표를 통해 창업의 기회를 잡았다는 점이 우리를 동기 부여 시켰다.
노력의 결과였는지 발표에서 1등을 차지했고 조동성 교수님과 면담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때 대학투자저널이라는 개인사업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들에게 법인 설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때서부터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자본금을 모았다. 그래서 설립 목적 자체가 지주회사인 ‘더밸류앤코(The Value & Co)’를 2003년 1월에 출범시켰다. 우리가 추구하는 ‘밸류’라는 단어와 함께 회사들을 거느린다는 의미의 ‘& Company’의 약자를 사명으로 정했다. 목표는 물론 한국의 버크셔 헤서웨이였다.
더밸류앤코를 통해 세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첫 번째는 기존 사업부인 대학투자저널, 두 번째는 가치투자 관련 출판, 세 번째는 우리의 핵심 역량인 투자 부문이었다. 후일 대학투자저널은 대학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머니&밸류’로, 출판은 ‘이콘출판’으로, 투자 부문은 ‘VIP투자자문’으로 독립해 더밸류앤코는 애초의 목표대로 지주회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얘기가 더밸류앤코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부각시켰으며 VIP투자자문 설립의 단초가 되었던 ‘더밸류 사모펀드’다. VIP펀드가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정식 펀드가 아니고 규모가 작다는 한계를 느끼던 터였다. 그러나 펀드를 만들기 위해 자산운용사나 투신사를 만들기에는 자본금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사모펀드였다.
당시 간접자산운용법에서는 공모펀드의 운용 주체를 자산운용사와 투신사로 정해놓았을 뿐 사모펀드의 운용 주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도 해보지 않았을 뿐 개인이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미쳐 법률적 검토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사무수탁팀이 있는 증권예탁원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증권예탁원 사무수탁팀에서는 한번 해보자는 의사 표시를 해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펀드 설립에 착수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운 좋게도 더밸류 사모펀드는 국내 최초로 개인이 운용주체가 되는 사모펀드로 금감원의 인가를 득할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의 꿈인 공식적인 펀드가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100억원의 펀드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뜻하지 않게 뜨거운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이후 우리의 사례를 보고 사모펀드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많은 문의를 해왔지만 아쉽게도 더밸류 사모펀드는 개인이 운용주체가 되는 마지막 펀드로 남게 되었다. 간접자산운용법이 개정되면서 사모펀드의 규정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2003년 7월에 출범한 더밸류 사모펀드는 현재 VIP투자자문의 대표 포트폴리오이자 공식적인 수익률로 자리잡았고 1년 7개월 누적 수익률 76%를 기록하고 있어 가치투자를 증명하겠다는 VIP펀드의 당초 취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더밸류 사모펀드 수익률 그래프>
#뜻밖에 찾아온 투자자문 설립의 기회
사모펀드는 공개 포트폴리오가 아닌 진짜 펀드 형태로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더밸류앤코가 금융 사업을 하는 것은 사모펀드가 좋은 성과를 내는 시점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모펀드 설립이 뉴스를 타자 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해왔고 특히 아이투자 회원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뢰를 보내주고 있었구나 하는 기쁨이 교차했다. 금융사를 만들면 과연 몇 명이나 우리를 믿고 가입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모펀드로는 여러 투자자들과 함께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사모펀드는 투자자 수가 50인 미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입 의사를 밝힌 투자자들에게 일일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사모펀드로는 한계가 있으니 투자자문사를 만들어 함께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라는 말을 전하고 애초에 가졌던 스케쥴을 앞당겨 투자자문 설립을 서둘렀다. 이렇게 탄생한 회사가 국내 최초의 학생 금융 벤처 ‘VIP투자자문’이다. 투자자문 설립 직후 졸업을 해서 일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절묘한 타이밍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시간을 투자에만 썼으면 좋겠다는 나의 개인적 꿈이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투자자문 설립이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그동안 했던 어떤 일보다 힘들었지만 우리 철학을 펼칠 수 있는 가치투자에 기반한 금융사를 설립한다는 생각에 끈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이 있어 행운이었다. 현업에 있는 분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었고 아이투자 회원 중 일부가 투자자문 설립을 위한 인력 채용에 응해줬다. 조언을 해준 분들은 지금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고 인력 채용에 응해준 사람들 중 합격자들은 현재 VIP투자자문의 운용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VIP투자자문의 초기 고객들은 아이투자 회원과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의 독자들이었다. 3년 운용의 까다로운 조건이었고 아무 레코드도 없는 상태였지만 흔쾌히 소중한 자금을 맡겨줬다. 심지어 투자 예정 기간에 30년이라고 적어 넣는 분도 있었다. 이 분들은 우리가 투자자문 설립 후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다행히 이 분들에게 50~60%의 수익률을 돌려드릴 수 있었다. 자기 자금으로 투자를 할 때보다 부담이 더 되는 건 사실이지만 고객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희열은 자기 자금 운용으로 얻는 수익의 이상임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이제 VIP투자자문은 600억원을 운용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VIP투자자문은 아직 진행형이고 할 일이 많이 남아있지만 최소한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VIP투자자문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고객이 투자원칙을 이해하고 믿어주는 행복하고 복 받은 회사라고 말이다.
#VIP투자자문의 미래
지난 4년을 돌아보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치투자 하나 믿고 덜렁 떠난 여정이 참으로 길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대한 편견, 주식투자에 대한 오해, 가치투자에 대한 불신, 현실적인 난관 등 잠을 못 이룰 정도의 숱한 장애물들을 만났지만 가치투자에 대한 믿음과 우리를 믿어주고 응원해준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VIP투자자문이 있을 수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시작한 탓에 대학의 낭만과 추억,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 등을 포기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런 빈 공간이 하고 싶었던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는 기쁨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VIP투자자문이 어떤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발전해나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투자문화를 건전하게 바꾸고 가치투자를 통해 고객을 정직한 부자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바라보고 꾸준히 매진한다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만은 확고하다.
마지막으로 금융 창업을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이 있다. 많은 예비 창업가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투자자문사를 설립할 수 있느냐는 메일을 자주 받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 본질보다는 절차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절차는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우리는 단 한번도 투자자문사를 목표로 해본 적이 없다. 가치투자를 알리고 싶었기에 책과 신문을 만들었고, 신문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개인사업자로 등록했고, 가치투자를 증명하고 싶었기에 사모펀드와 투자자문사가 필요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일을 하고 싶은지, 비전이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모든 사업이 그렇겠지만 특히 금융에서는 신뢰가 생명이다. 즉 더밸류 사모펀드는 신뢰를 모은 펀드이고 VIP투자자문은 신뢰를 바탕으로 출발한 금융회사이지 돈을 모았던 것이 아니다. 고객을 상대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VIP투자자문을 찾는 고객은 신뢰를 맡기러 오는 것이지 돈을 맡기러 오지 않는다.
미래의 금융시장을 이끌어갈 대학생들이 이런 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낸다면 제2의 VIP투자자문 아니 한국의 버크셔 헤서웨이가 탄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VIP투자자문 대표이사 최준철
wallstreet@viptoo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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