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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의 책 이야기(6) - 벤저민 그레이엄
벤저민 그레이엄 Benjamin Graham in 1996
부제: The Memoirs of the Dean of Wall Street
지은이: 벤저민 그레이엄 Benjamin Graham (1894-05-09~1976-09-21)
옮긴이: 김상우
출판사: 굿모닝북스 / 2004년 09월 / 415쪽 / 1만4800원
■ 요약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이 직접 쓴 회고록입니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증권사에 취업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월가에서 투자의 구루이자 월가의 학장이란 영예를 차지한 과정과 그의 생애를 그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듣습니다.
주식투자와 직접 관련된 내용은 7~13장에서, 그것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가볍게 다룹니다. 그레이엄의 투자법을 배울 것으로 기대했던 독자는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투자에 입문해서 인정받고 크게 성공하는 과정과 대공황이란 경제위기를 맞아 좌절한 후 결국 이겨내는 과정을 그립니다. 또, 그와 오랜 관계를 맺거나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의 많은 에피소드는 그가 쓴, '현명한 투자자'라는 최고의 투자서에서 얻는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책 구성은 세이모어 차트만이 쓴 31쪽 장문의 ‘서문’에서 그레이엄에 대해 일별한 다음, 그레이엄이 직접 쓴 회고록을 16개 장으로 나눠 그의 삶을 정리합니다.
- 1~6장, 어린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 7~14장, 월가에 진출해서 주식 전문가로서 성공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는 과정, '증권분석'의 탄생
- 15장, 투자 외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문학
- 16장, 경제학자로서 갈망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자’라는 명예
■ 개요
서문
그레이엄이 1956년 은퇴 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강의할 때 동료 교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세이모어 차트만은 자신이 아는 그레이엄은 개인적인 경험, 특히 실수에서 배우려고 일생 동안 노력했던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합니다.
차트만이란 분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 1928년생(2015년 사망)으로 버클리에서 수사학을 가르쳤으며, 영화와 문학 평론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레이엄과 관련된 글은 찾지 못했고, 그레이엄처럼 결혼을 세 번했더군요.
놀라운 지능과 기억력의 소유자인 그레이엄은, 찰리 멍거가 그렇듯이, 편향된 기억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저의 혼란스런 기억력에 대해 건망증인지 혹은 치매 초기 증상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저도 대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몹쓸 생각이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레이엄은 은퇴 후에도 금융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옛 제자와 동료들이, 특히 시장이 침체에 빠진 시절에 시장에 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면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생애 마지막 해인 1976년에 제임스 레아와 함께 뮤추얼 펀드를 설립할 정도로 투자에 대한 열정은 생애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 뉴욕에서의 어린 시절
벤저민 그레이엄은 1894년 삼형제 중 막내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살 때, 그레이엄의 아버지가 가업인 도자기 판매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신설한 미국 지사를 맡으면서 일가족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2. 가족의 비극과 어머니의 헌신
그레이엄이 9살 때, 35세이던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의 유산관리 실패로 부유했던 가족은 어려운 처지로 전락합니다. 그레이엄의 3형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은 일을 해야 했고, 이런 형편은 그레이엄이 대학을 졸업하는 20세까지 계속됩니다.
3. 독서와 기억력
그레이엄은 자신의 성격이 아버지와 사별한 9세때부터 공립학교를 졸업하는 12세때까지 3년 동안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자신은 검소하고 돈에 집착하며 어떤 사람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차례 밝히는데요. 이런 그의 성격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돈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존중할 정도였기에 인생의 성공 지표로 큰 돈을 벌어서 펑펑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단순하고 중요한 물질적 풍요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이요.
가장 뛰어난 재정 전략이란 그 사람의 수입 범위 내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p.99)
The most brilliant financial strategy consists of living well within one's means.
월반을 거듭하는 통에 나이 차이가 있는 학교 동급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그레이엄은, 대신 책을 많이 읽었는데요. 도서관에서 2주에 네다섯 권의 책을 대여해 읽었고 친구들 사이에 읽히는 책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나중에 독서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고서 놀랐다고 합니다.
4. 고교 시절: 브루클린과 브롱스
두 선생님과의 일화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머니의 미숙한 하숙집 운영 실패, 어린 나이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일을 하는 13세의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이 무렵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유대인의 편협함에 거리를 두게 됩니다.
나는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유대인들에게 정서적으로 충성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충성심 그 자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커다란 정서적 미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 충성심은 방패의 빛나는 앞면이지만 뒷면에는 편견과 불관용, 그리고 광신이 새겨져 있을 수 있다. 나는 단순히 내가 그들의 일부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나 제도를 위해 내 자신을 열정적으로 갖다 바칠 수는 없다. (p.111)
5. 농장일꾼과 기계공 생활
16살에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농장에서 일했고, 컬럼비아 대학의 착오로 장학금을 받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기계공이 된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기계공으로 생활하면서 컬럼비아 대학에 장학금을 재신청했고, 이때 비로소 대학에서는 그레이엄이 장학금 대상이었음에도 이 장학금을 앞서 받은 그의 사촌과 혼동했음을 알게 됩니다. 대학에서는 다른 장학금을 주면서 입학을 허가합니다.
6. 컬럼비아 대학교
1911년 9월 17세의 그레이엄은 동창회 장학생으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서 20세인 1914년 3월, 2년 6개월만에 졸업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중에서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비교적 장기간 일했던 ‘US익스프레스’에 대한 얘기가 재미있는데요. ‘US익스프레스’에서 일하던 중에 신임 사장으로 부임한 ‘로버츠’라는 인물을 만났는데, 꽤나 거만했던 모양입니다.
7년이 지난 다음 근무하던 증권사 업무로 ‘로버츠’를 다시 만났는데, 젊은 그레이엄에게 굽실거리는 처지로 전락한 (쪼그라든 회사의 노쇠한 수다꾼) 경영자를 보면서 그레이엄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동안 사람과 기업의 수많은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업의 삶과 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업도 사람도 늙고 상승세가 꺾인다. 그러나 쓰러지던 기업은 새로운 생명의 피를 수혈받아 다시 양지로 나올 수 있는 반면, 기업가는 한번 늙어버리면 대개는 그것으로 끝이 난다. (p.166)
7. 월스트리트를 선택하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할 때, 그레이엄은 철학, 수학, 영문학, 3개 학과의 교수직을 제의 받습니다. 교수직은 자기 만족이 큰 직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초봉이 낮은) 경제적 이유로 결정을 미루게 되는데요. 결국 평소 진로를 상담하던, 케펠 학장으로부터 추천받은 증권회사에 취직하게 됩니다. 개인 펀드를 만들어 독립할 때까지 9년 동안 근무한 ‘뉴버거 증권사’의 사장 알프레드 뉴버거는 그레이엄을 채용하기로 결정한 직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젊은이, 한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네. 자네가 투기를 한다면 돈을 모두 잃을 걸세. 그것을 항상 명심하게. (p.184)
One last warning, young man. If you speculate, you'll lose your money. Always remember that.
그레이엄은 당시 교과서로 여겨지던 '채권투자의 원칙'으로 채권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요. 이를 기초로 ‘미주리 퍼시픽 레일로드’ 채권을 분석한 다음, 매우 위험하다는 확신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그레이엄은 이 보고서의 가치를 인정한 다른 증권사로부터 증권분석사로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습니다. 이에 그레이엄이 퇴직 의사를 밝히자 뉴버거 사장은 우리도 증권분석 부서를 만들 거라면서 그레이엄을 붙잡습니다.
8. 주식가치의 새로운 발견
1910년대 주식은 투기수단으로 여겨졌고 투자는 채권에 한정되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식의 가격은 펀더멘탈보다는 내부정보, 소위 말하는 ‘그들, 그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고요.
통계숫자가 무시되던 상황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대규모 제조업체들의 재무구조가 개선되었고 주식의 (내부정보 등이 아닌) 내재가치를 따지는 투자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신출내기 그레이엄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1915년 첫 번째 차익거래를 성공했고요.
그레이엄의 전문분야는 차익거래였고, 1956년 은퇴할 때까지 이 투자법을 활용했습니다. 워런 버핏도 투자조합 시절(1956년~1969년)에는 이 투자법을 3가지 주요 투자법(*) 중 하나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 투자조합 시절 버핏의 3가지 투자법: 1)일반 투자 주식, 2)워크아웃/차익거래, 3)경영 참여 주식
나는 분석결과에 따라 아주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보통주를 매수하고 너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다른 보통주를 매도하는 식의 보수적인 투자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p.217)
9. 증권분석가로서 성공하다
승진을 거듭하던 그레이엄은 1920년, 26세에, ‘뉴버거 증권사’의 파트너가 됩니다. 그는 일본 채권 중개로 큰 수익을 얻었으며, 주식은 차익거래로 안정된 수익을 얻었고, 증권사에서는 파트너로 급여 외 회사 수입의 2.5%를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1919년의 월스트리트는 지금(1960~70년대)과는 달리 윤리적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들려주는 얘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2023년) 우리가 가끔 겪는 일입니다.
그들은 고객의 주문을 처리하거나 예탁금과 예치 자산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매우 신뢰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위법행위를 대충 눈감아 주었고, 상당수는 대규모 시세 조작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들은 고객들 대부분이 종국에 가서는 대규모 손실을 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투기행위를 조장했다. (p.257)
10. 1920년대의 대강세장: 백만장자가 되다
그레이엄이 월스트리트에서 보낸 42년(1914~1956년)은 증권사에 들어가 일반 직원으로 시작해서 주니어 파트너로서 퇴사하기까지 9년, 그리고 직접 만든 투자사의 사장으로서 33년입니다.
그는 1923년, ‘해리스 그룹’의 자금을 운용하는 일을 맡으면서 9년간 다녔던, ‘뉴버거 증권사’를 퇴사한 후 ‘그레이엄 코퍼레이션’을 창립해서 독립합니다. 첫 법인은 높은 수익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운영했으면서도 2년 6개월만에 청산하게 되는데요. 그레이엄이 들려주는 청산 이유에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투자금을 맡긴 해리스와 잦은 점심 모임을 가졌는데, 그는 매번 주워들은 정보를 그레이엄에게 들려줬다고 합니다. 그레이엄이 그의 정보를 활용한 적은 없었는데, 해리스는 만날 때마다, 실패 사례는 놔두고 수익이 난 사례만을 끊임없이 화제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긋지긋했겠죠^^ 그레이엄은 이 사례를 두고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네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참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p.264)
1926년 1월 1일, 관리하던 계좌와 자신의 투자금을 ‘벤저민 그레이엄 합동계좌’로 옮겨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40만 달러로 시작한 투자금은 수익금이 더해져 3년 뒤, 1928년말 250만 달러로 불어납니다.
11.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
‘노던 파이프라인’의 1925년 회계자료를 분석한 그레이엄은 이 주식이 매년 주당 6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사업과 관련 없는 현금성 자산을 주당 95달러 보유하고 있는데도 주가는 65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시 상당량의 주식을 매수한 다음 경영진을 만나 불필요한 자산을 매각해서 주주들에게 나눠줄 것을 요청합니다. 예상과 달리 경영진은 완강히 거절했고 경영진으로부터 회사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보유주식을 처분하라는 비아냥까지 듣게 됩니다.
그레이엄은 1927년 주총에 참석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했지만 준비 부족으로 인해 주총장에서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동감할 수밖에 없는, 그 시절 그레이엄의 심경을 들어볼게요.
1926년 내가 순진하게도 기업의 경영진을 설득해 그 회사가 당시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주로서의 노력을 처음으로 기울이던 시절, 월 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은 나를 거대한 풍차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돌진하는 정신 나간 돈키호테쯤으로 여겼다. (p.279)
(열 받은) 그레이엄은 주주들의 동의서를 확보하고 변호사를 대동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2008년 주총에 참석해서 자신을 포함한 이사 2명을 선임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사장의 미팅 요청을 받고 갔더니, 그레이엄이 그토록 원했던 불용 자산 매각 계획을 내놓습니다. 그레이엄은 그렇게 반대하던 사장의 변심이 궁금했는데-그가 고용한 변호사가 알려주기를-대주주인 록펠러 재단에서 그레이엄의 제안에 찬성했던 것입니다. 그레이엄은 허탈했을까요?
저는 주주총회에 참석해서 주로 배당금 증액을 요청하는 발언을 하곤 합니다. 기업이 경영을 잘 해서 수익을 많이 얻는다면 회사 임직원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듯이 주주들에게도 배당금을 더 주는 게 옳지 않느냐는 당연한 주장을 하는 것인데요.
가끔 제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람을 느낄 일이지만 대부분은 제 발언과는 무관하게 회사(오너)의 필요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끔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짐작하는 상황은 있었는데요. 결과와 관계없이 이런 정도의 노력을 하는 것은 주주로서 의무이면서 책임입니다^^
이 내용은 책에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주주 행동주의를 다룬 책, 제프 그램의 '의장! 이의 있습니다'에서 더 많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12. 아들의 죽음과 '증권분석'의 탄생
1927년 4월 20일, 첫 아들 아이작 뉴턴이 9살의 나이에 숨집니다. 상심이 컸던 그레이엄은-다른 일에 집중함으로써-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쓰기로 하는데요. 그는 생각을 책으로 옮기기 위한 전 단계로 1927년 가을 학기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증권분석’ 강의를 시작합니다.
첫 학기에는 당시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조교수였던 데이비드 도드가 수강했는데, 이후 도드는 강의 조수이자 '증권분석'의 공동 저자, 투자사업의 동반자가 됩니다.
13. 대폭락의 시련을 넘어
그레이엄은 1929년 대공황 첫 해는 차익거래에 집중했던 덕분에 20% 손실로 비교적 선방했습니다. 1월초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즐길 정도로 최악은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별개로 그는 대폭락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버나드 바루크와의 만남입니다.
1929년 그레이엄은 그보다 22년 연상인 버나드 바루크와 만났는데요. 두 사람은 당시 주식시장의 과도한 상승과 투기꾼들의 광란하는 모습, 유명 투자은행들의 흥청거림과 같은 모든 상황이 갑작스런 폭락사태와 함께 끝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숙했던 35세의 그레이엄은 미처 대응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바루크가 당시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꼬집으면서 연리 8%의 기한부 대출을 받아 겨우 2%의 배당금을 지급하는 주식을 사는 사태를 지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보상의 법칙에 따라 우리는 언젠가 그 반대되는 상황, 즉 연리 2%의 기한부 대출을 받아 8%를 배당해주는 우량주에 투자하는 것도 예상해야 합니다.” (p.335)
1930년 1월 휴가 때는 휴양지인 플로리다에서 93세의 성공한 사업가 존 딕스를 만납니다. 그는 그레이엄이 하는 일에 대해 듣고서 부채가 얼마인지 등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들려줍니다.
그레이엄 씨, 나는 당신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바랍니다. 내일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세요. 그리고 사무실로 가서 당신이 보유한 유가증권을 전부 팔아 부채를 갚고 자본금을 파트너들에게 돌려주세요. 만약 내가 지금 당신의 입장이라면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할 겁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경험도 더 많습니다. 나의 충고를 듣는 게 좋을 겁니다. (p.342)
하지만! 그레이엄은 자신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이 무례한 참견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해 50.5%, 1931년은 16%, 1932년은 3% 손실로 4년 동안 70% 이상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4년 동안 그는 투자금이 크게 줄었지만 파산한 것은 아니었고, 10년 전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4/5나 잃어버린 데 따른 상실감이 컸고 무엇보다 시장 하락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힘들어 했습니다.
나의 괴로움은 재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한 장기전과 함께 시장이 돌아섰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추락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실망, 대공황과 손실이 언제 끝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완전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p.347)
1932년 그레이엄이 본문을 쓰고 도드는 통계자료 확인과 표를 만드는 일 등을 맡는 방식으로 '증권분석'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6개월 후인 1934년, 투자의 고전이 출간됩니다.
14. 가치평가 전문가 활동
1933년 99로 마감한 다우지수는 1937년 3월 197의 고점까지 강세장이 이어졌는데, 1933년 50% 수익을 올리면서부터 그레이엄은 살아납니다. 1933년 37.5만 달러로 시작한 그레이엄은 1935년 12월까지 과거 손실 전부를 회복합니다.
1936년 1월, 그동안 운영했던 ‘벤저민 그레이엄 합동 계좌’를 청산하고 ‘그레이엄 뉴먼 코퍼레이션’을 설립해서 1956년 청산할 때까지 운영하게 됩니다.
기업 가치 평가에 대한 자문, 기고 등 투자 외적인 활동을 늘리고 1939년 '증권분석' 2차 개정판에 이어 개정판을 계속 출간했으며, 1949년에는 일반인 투자자를 위한, '현명한 투자자'를 출간합니다.
1962년 출간한 '증권 분석' 4판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장분석 및 평가 문제에 대한 우스울 정도로 단순한 2가지 해결책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면서, 자평합니다.
1. 주식과 채권의 비율은 공히 25% 이하여서는 안 된다. 나머지 50%는 주식의 시장가치가 높은지, 보통인지, 낮은지에 대한 투자자 개인의 확신과 판단에 따라 할당해야 한다. 만약 투자자가 이 문제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주식과 채권을 50:50으로 유지하는 것도 논리적일 것이다.
2. 개별 유가증권의 선택 문제와 관련해서 채권 구성은 반드시 우량 종목으로 제한해야 한다. 나는 애널리스트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투자자들이 평균 이상의 실적을 가져다 주는 보통주를 고르는 능력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표준적인 포트폴리오 구성은 어느 정도 다우존스 산업평균을 모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p.358)
15. 나의 극작가 경력
워런 버핏은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이 투자에 자신의 능력을 10%도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투자 외적으로 그레이엄이 진심으로 빠졌던 문학가로서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는 그가 가장 잘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듯, 실패하고 때로는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16.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
미래 세대가 자신의 이름을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자’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정도로 이 계획이 정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의 얄팍한 경제학 지식은 그레이엄이 추구했던 정책 내용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OTL
에필로그1: 63세 때의 자화상
3자의 위치에서 63년을 살아온 그레이엄 자신을 객관적으로 조망합니다.
에필로그2: 80세 생일 연설
1974년 80세 생일 연설문에서 그가 닮고 싶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을 얘기하며, 그의 인생이 프랭클린의 성공과 비교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밝힙니다. 또한 자신이 추구했던 정신적인 즐거움에 대해 얘기하며 아이들이 배웠으면 합니다.
내가 일생 동안 누렸던 즐거움의 최소한 절반은 정신의 세계, 미와 문화, 특히 문학과 예술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상 무료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시작하기 위한 관심과 우리 앞에 펼쳐진 풍요를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손자 손녀 여러분, 가능하면 시작하기 위한 관심을 가지세요. 그리고 노력을 계속하세요. 일단 여러분이 그것-문화적인 삶-을 찾게 되면,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p.405)
■ 평가
찰리 멍거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룬 ‘전기(傳記 biography)’를 많이 읽는 ‘전기 애호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Poor Charlie’s Almanack in 2008, Jay Kim 번역본'에서 멍거는 위인전 예찬론을 펼칩니다.
나는 위인전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당신이 어떤 위대한 이론을 배우고 싶다면, 그 개념을 만든 사람을 친구로 만드세요. 마치 애덤 스미스를 친구로 두면 경제학 박사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위인전을 읽고 그들과 친구가 되세요. '돌아가신 위인'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이 우습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위인들의 좋은 생각은 당신의 삶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60대~70대의 그레이엄이 살아온 지난 날을 회상하며 쓴 회고록이지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어느 ‘자서전’에 못지않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레이엄이 어떻게 주식투자자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투자의 구루가 되었는지 주위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볼 수 있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다 된통 당하기도 하는, 실수하는 그레이엄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실수에서 배워 이겨내는 그레이엄을 보면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레이엄의 삶의 여정을 통해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의 갖가지 얘기들과 이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면서, 그레이엄이 투자의 스승을 넘어 인생의 스승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특히 좋았던 글귀
1916년 주식을 거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투기꾼(speculators)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금융거래와 경마 또는 다른 도박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다. (p.216)
오늘날은 모두가 투자자(investor)라고 부르는데, 정말 그럴까요?^^
* 문장 뒤에 표시된 숫자는 이 글이 나오는 책 페이지입니다.
부제: The Memoirs of the Dean of Wall Street
지은이: 벤저민 그레이엄 Benjamin Graham (1894-05-09~1976-09-21)
옮긴이: 김상우
출판사: 굿모닝북스 / 2004년 09월 / 415쪽 / 1만4800원
■ 요약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이 직접 쓴 회고록입니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증권사에 취업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월가에서 투자의 구루이자 월가의 학장이란 영예를 차지한 과정과 그의 생애를 그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듣습니다.
주식투자와 직접 관련된 내용은 7~13장에서, 그것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가볍게 다룹니다. 그레이엄의 투자법을 배울 것으로 기대했던 독자는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투자에 입문해서 인정받고 크게 성공하는 과정과 대공황이란 경제위기를 맞아 좌절한 후 결국 이겨내는 과정을 그립니다. 또, 그와 오랜 관계를 맺거나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의 많은 에피소드는 그가 쓴, '현명한 투자자'라는 최고의 투자서에서 얻는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책 구성은 세이모어 차트만이 쓴 31쪽 장문의 ‘서문’에서 그레이엄에 대해 일별한 다음, 그레이엄이 직접 쓴 회고록을 16개 장으로 나눠 그의 삶을 정리합니다.
- 1~6장, 어린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 7~14장, 월가에 진출해서 주식 전문가로서 성공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는 과정, '증권분석'의 탄생
- 15장, 투자 외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문학
- 16장, 경제학자로서 갈망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자’라는 명예
■ 개요
서문
그레이엄이 1956년 은퇴 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강의할 때 동료 교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세이모어 차트만은 자신이 아는 그레이엄은 개인적인 경험, 특히 실수에서 배우려고 일생 동안 노력했던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합니다.
차트만이란 분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 1928년생(2015년 사망)으로 버클리에서 수사학을 가르쳤으며, 영화와 문학 평론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레이엄과 관련된 글은 찾지 못했고, 그레이엄처럼 결혼을 세 번했더군요.
놀라운 지능과 기억력의 소유자인 그레이엄은, 찰리 멍거가 그렇듯이, 편향된 기억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저의 혼란스런 기억력에 대해 건망증인지 혹은 치매 초기 증상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저도 대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몹쓸 생각이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레이엄은 은퇴 후에도 금융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옛 제자와 동료들이, 특히 시장이 침체에 빠진 시절에 시장에 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면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생애 마지막 해인 1976년에 제임스 레아와 함께 뮤추얼 펀드를 설립할 정도로 투자에 대한 열정은 생애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 뉴욕에서의 어린 시절
벤저민 그레이엄은 1894년 삼형제 중 막내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살 때, 그레이엄의 아버지가 가업인 도자기 판매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신설한 미국 지사를 맡으면서 일가족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2. 가족의 비극과 어머니의 헌신
그레이엄이 9살 때, 35세이던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의 유산관리 실패로 부유했던 가족은 어려운 처지로 전락합니다. 그레이엄의 3형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은 일을 해야 했고, 이런 형편은 그레이엄이 대학을 졸업하는 20세까지 계속됩니다.
3. 독서와 기억력
그레이엄은 자신의 성격이 아버지와 사별한 9세때부터 공립학교를 졸업하는 12세때까지 3년 동안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자신은 검소하고 돈에 집착하며 어떤 사람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차례 밝히는데요. 이런 그의 성격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돈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존중할 정도였기에 인생의 성공 지표로 큰 돈을 벌어서 펑펑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단순하고 중요한 물질적 풍요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이요.
가장 뛰어난 재정 전략이란 그 사람의 수입 범위 내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p.99)
The most brilliant financial strategy consists of living well within one's means.
월반을 거듭하는 통에 나이 차이가 있는 학교 동급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그레이엄은, 대신 책을 많이 읽었는데요. 도서관에서 2주에 네다섯 권의 책을 대여해 읽었고 친구들 사이에 읽히는 책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나중에 독서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고서 놀랐다고 합니다.
4. 고교 시절: 브루클린과 브롱스
두 선생님과의 일화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머니의 미숙한 하숙집 운영 실패, 어린 나이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일을 하는 13세의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이 무렵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유대인의 편협함에 거리를 두게 됩니다.
나는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유대인들에게 정서적으로 충성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충성심 그 자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커다란 정서적 미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 충성심은 방패의 빛나는 앞면이지만 뒷면에는 편견과 불관용, 그리고 광신이 새겨져 있을 수 있다. 나는 단순히 내가 그들의 일부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나 제도를 위해 내 자신을 열정적으로 갖다 바칠 수는 없다. (p.111)
5. 농장일꾼과 기계공 생활
16살에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농장에서 일했고, 컬럼비아 대학의 착오로 장학금을 받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기계공이 된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기계공으로 생활하면서 컬럼비아 대학에 장학금을 재신청했고, 이때 비로소 대학에서는 그레이엄이 장학금 대상이었음에도 이 장학금을 앞서 받은 그의 사촌과 혼동했음을 알게 됩니다. 대학에서는 다른 장학금을 주면서 입학을 허가합니다.
6. 컬럼비아 대학교
1911년 9월 17세의 그레이엄은 동창회 장학생으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서 20세인 1914년 3월, 2년 6개월만에 졸업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중에서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비교적 장기간 일했던 ‘US익스프레스’에 대한 얘기가 재미있는데요. ‘US익스프레스’에서 일하던 중에 신임 사장으로 부임한 ‘로버츠’라는 인물을 만났는데, 꽤나 거만했던 모양입니다.
7년이 지난 다음 근무하던 증권사 업무로 ‘로버츠’를 다시 만났는데, 젊은 그레이엄에게 굽실거리는 처지로 전락한 (쪼그라든 회사의 노쇠한 수다꾼) 경영자를 보면서 그레이엄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동안 사람과 기업의 수많은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업의 삶과 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업도 사람도 늙고 상승세가 꺾인다. 그러나 쓰러지던 기업은 새로운 생명의 피를 수혈받아 다시 양지로 나올 수 있는 반면, 기업가는 한번 늙어버리면 대개는 그것으로 끝이 난다. (p.166)
7. 월스트리트를 선택하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할 때, 그레이엄은 철학, 수학, 영문학, 3개 학과의 교수직을 제의 받습니다. 교수직은 자기 만족이 큰 직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초봉이 낮은) 경제적 이유로 결정을 미루게 되는데요. 결국 평소 진로를 상담하던, 케펠 학장으로부터 추천받은 증권회사에 취직하게 됩니다. 개인 펀드를 만들어 독립할 때까지 9년 동안 근무한 ‘뉴버거 증권사’의 사장 알프레드 뉴버거는 그레이엄을 채용하기로 결정한 직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젊은이, 한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네. 자네가 투기를 한다면 돈을 모두 잃을 걸세. 그것을 항상 명심하게. (p.184)
One last warning, young man. If you speculate, you'll lose your money. Always remember that.
그레이엄은 당시 교과서로 여겨지던 '채권투자의 원칙'으로 채권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요. 이를 기초로 ‘미주리 퍼시픽 레일로드’ 채권을 분석한 다음, 매우 위험하다는 확신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그레이엄은 이 보고서의 가치를 인정한 다른 증권사로부터 증권분석사로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습니다. 이에 그레이엄이 퇴직 의사를 밝히자 뉴버거 사장은 우리도 증권분석 부서를 만들 거라면서 그레이엄을 붙잡습니다.
8. 주식가치의 새로운 발견
1910년대 주식은 투기수단으로 여겨졌고 투자는 채권에 한정되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식의 가격은 펀더멘탈보다는 내부정보, 소위 말하는 ‘그들, 그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고요.
통계숫자가 무시되던 상황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대규모 제조업체들의 재무구조가 개선되었고 주식의 (내부정보 등이 아닌) 내재가치를 따지는 투자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신출내기 그레이엄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1915년 첫 번째 차익거래를 성공했고요.
그레이엄의 전문분야는 차익거래였고, 1956년 은퇴할 때까지 이 투자법을 활용했습니다. 워런 버핏도 투자조합 시절(1956년~1969년)에는 이 투자법을 3가지 주요 투자법(*) 중 하나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 투자조합 시절 버핏의 3가지 투자법: 1)일반 투자 주식, 2)워크아웃/차익거래, 3)경영 참여 주식
나는 분석결과에 따라 아주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보통주를 매수하고 너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다른 보통주를 매도하는 식의 보수적인 투자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p.217)
9. 증권분석가로서 성공하다
승진을 거듭하던 그레이엄은 1920년, 26세에, ‘뉴버거 증권사’의 파트너가 됩니다. 그는 일본 채권 중개로 큰 수익을 얻었으며, 주식은 차익거래로 안정된 수익을 얻었고, 증권사에서는 파트너로 급여 외 회사 수입의 2.5%를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1919년의 월스트리트는 지금(1960~70년대)과는 달리 윤리적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들려주는 얘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2023년) 우리가 가끔 겪는 일입니다.
그들은 고객의 주문을 처리하거나 예탁금과 예치 자산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매우 신뢰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위법행위를 대충 눈감아 주었고, 상당수는 대규모 시세 조작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들은 고객들 대부분이 종국에 가서는 대규모 손실을 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투기행위를 조장했다. (p.257)
10. 1920년대의 대강세장: 백만장자가 되다
그레이엄이 월스트리트에서 보낸 42년(1914~1956년)은 증권사에 들어가 일반 직원으로 시작해서 주니어 파트너로서 퇴사하기까지 9년, 그리고 직접 만든 투자사의 사장으로서 33년입니다.
그는 1923년, ‘해리스 그룹’의 자금을 운용하는 일을 맡으면서 9년간 다녔던, ‘뉴버거 증권사’를 퇴사한 후 ‘그레이엄 코퍼레이션’을 창립해서 독립합니다. 첫 법인은 높은 수익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운영했으면서도 2년 6개월만에 청산하게 되는데요. 그레이엄이 들려주는 청산 이유에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투자금을 맡긴 해리스와 잦은 점심 모임을 가졌는데, 그는 매번 주워들은 정보를 그레이엄에게 들려줬다고 합니다. 그레이엄이 그의 정보를 활용한 적은 없었는데, 해리스는 만날 때마다, 실패 사례는 놔두고 수익이 난 사례만을 끊임없이 화제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긋지긋했겠죠^^ 그레이엄은 이 사례를 두고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네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참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p.264)
1926년 1월 1일, 관리하던 계좌와 자신의 투자금을 ‘벤저민 그레이엄 합동계좌’로 옮겨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40만 달러로 시작한 투자금은 수익금이 더해져 3년 뒤, 1928년말 250만 달러로 불어납니다.
11.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
‘노던 파이프라인’의 1925년 회계자료를 분석한 그레이엄은 이 주식이 매년 주당 6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사업과 관련 없는 현금성 자산을 주당 95달러 보유하고 있는데도 주가는 65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시 상당량의 주식을 매수한 다음 경영진을 만나 불필요한 자산을 매각해서 주주들에게 나눠줄 것을 요청합니다. 예상과 달리 경영진은 완강히 거절했고 경영진으로부터 회사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보유주식을 처분하라는 비아냥까지 듣게 됩니다.
그레이엄은 1927년 주총에 참석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했지만 준비 부족으로 인해 주총장에서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동감할 수밖에 없는, 그 시절 그레이엄의 심경을 들어볼게요.
1926년 내가 순진하게도 기업의 경영진을 설득해 그 회사가 당시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주로서의 노력을 처음으로 기울이던 시절, 월 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은 나를 거대한 풍차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돌진하는 정신 나간 돈키호테쯤으로 여겼다. (p.279)
(열 받은) 그레이엄은 주주들의 동의서를 확보하고 변호사를 대동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2008년 주총에 참석해서 자신을 포함한 이사 2명을 선임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사장의 미팅 요청을 받고 갔더니, 그레이엄이 그토록 원했던 불용 자산 매각 계획을 내놓습니다. 그레이엄은 그렇게 반대하던 사장의 변심이 궁금했는데-그가 고용한 변호사가 알려주기를-대주주인 록펠러 재단에서 그레이엄의 제안에 찬성했던 것입니다. 그레이엄은 허탈했을까요?
저는 주주총회에 참석해서 주로 배당금 증액을 요청하는 발언을 하곤 합니다. 기업이 경영을 잘 해서 수익을 많이 얻는다면 회사 임직원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듯이 주주들에게도 배당금을 더 주는 게 옳지 않느냐는 당연한 주장을 하는 것인데요.
가끔 제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람을 느낄 일이지만 대부분은 제 발언과는 무관하게 회사(오너)의 필요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끔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짐작하는 상황은 있었는데요. 결과와 관계없이 이런 정도의 노력을 하는 것은 주주로서 의무이면서 책임입니다^^
이 내용은 책에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주주 행동주의를 다룬 책, 제프 그램의 '의장! 이의 있습니다'에서 더 많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12. 아들의 죽음과 '증권분석'의 탄생
1927년 4월 20일, 첫 아들 아이작 뉴턴이 9살의 나이에 숨집니다. 상심이 컸던 그레이엄은-다른 일에 집중함으로써-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쓰기로 하는데요. 그는 생각을 책으로 옮기기 위한 전 단계로 1927년 가을 학기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증권분석’ 강의를 시작합니다.
첫 학기에는 당시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조교수였던 데이비드 도드가 수강했는데, 이후 도드는 강의 조수이자 '증권분석'의 공동 저자, 투자사업의 동반자가 됩니다.
13. 대폭락의 시련을 넘어
그레이엄은 1929년 대공황 첫 해는 차익거래에 집중했던 덕분에 20% 손실로 비교적 선방했습니다. 1월초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즐길 정도로 최악은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별개로 그는 대폭락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버나드 바루크와의 만남입니다.
1929년 그레이엄은 그보다 22년 연상인 버나드 바루크와 만났는데요. 두 사람은 당시 주식시장의 과도한 상승과 투기꾼들의 광란하는 모습, 유명 투자은행들의 흥청거림과 같은 모든 상황이 갑작스런 폭락사태와 함께 끝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숙했던 35세의 그레이엄은 미처 대응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바루크가 당시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꼬집으면서 연리 8%의 기한부 대출을 받아 겨우 2%의 배당금을 지급하는 주식을 사는 사태를 지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보상의 법칙에 따라 우리는 언젠가 그 반대되는 상황, 즉 연리 2%의 기한부 대출을 받아 8%를 배당해주는 우량주에 투자하는 것도 예상해야 합니다.” (p.335)
1930년 1월 휴가 때는 휴양지인 플로리다에서 93세의 성공한 사업가 존 딕스를 만납니다. 그는 그레이엄이 하는 일에 대해 듣고서 부채가 얼마인지 등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들려줍니다.
그레이엄 씨, 나는 당신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바랍니다. 내일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세요. 그리고 사무실로 가서 당신이 보유한 유가증권을 전부 팔아 부채를 갚고 자본금을 파트너들에게 돌려주세요. 만약 내가 지금 당신의 입장이라면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할 겁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경험도 더 많습니다. 나의 충고를 듣는 게 좋을 겁니다. (p.342)
하지만! 그레이엄은 자신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이 무례한 참견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해 50.5%, 1931년은 16%, 1932년은 3% 손실로 4년 동안 70% 이상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4년 동안 그는 투자금이 크게 줄었지만 파산한 것은 아니었고, 10년 전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4/5나 잃어버린 데 따른 상실감이 컸고 무엇보다 시장 하락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힘들어 했습니다.
나의 괴로움은 재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한 장기전과 함께 시장이 돌아섰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추락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실망, 대공황과 손실이 언제 끝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완전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p.347)
1932년 그레이엄이 본문을 쓰고 도드는 통계자료 확인과 표를 만드는 일 등을 맡는 방식으로 '증권분석'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6개월 후인 1934년, 투자의 고전이 출간됩니다.
14. 가치평가 전문가 활동
1933년 99로 마감한 다우지수는 1937년 3월 197의 고점까지 강세장이 이어졌는데, 1933년 50% 수익을 올리면서부터 그레이엄은 살아납니다. 1933년 37.5만 달러로 시작한 그레이엄은 1935년 12월까지 과거 손실 전부를 회복합니다.
1936년 1월, 그동안 운영했던 ‘벤저민 그레이엄 합동 계좌’를 청산하고 ‘그레이엄 뉴먼 코퍼레이션’을 설립해서 1956년 청산할 때까지 운영하게 됩니다.
기업 가치 평가에 대한 자문, 기고 등 투자 외적인 활동을 늘리고 1939년 '증권분석' 2차 개정판에 이어 개정판을 계속 출간했으며, 1949년에는 일반인 투자자를 위한, '현명한 투자자'를 출간합니다.
1962년 출간한 '증권 분석' 4판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장분석 및 평가 문제에 대한 우스울 정도로 단순한 2가지 해결책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면서, 자평합니다.
1. 주식과 채권의 비율은 공히 25% 이하여서는 안 된다. 나머지 50%는 주식의 시장가치가 높은지, 보통인지, 낮은지에 대한 투자자 개인의 확신과 판단에 따라 할당해야 한다. 만약 투자자가 이 문제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주식과 채권을 50:50으로 유지하는 것도 논리적일 것이다.
2. 개별 유가증권의 선택 문제와 관련해서 채권 구성은 반드시 우량 종목으로 제한해야 한다. 나는 애널리스트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투자자들이 평균 이상의 실적을 가져다 주는 보통주를 고르는 능력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표준적인 포트폴리오 구성은 어느 정도 다우존스 산업평균을 모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p.358)
15. 나의 극작가 경력
워런 버핏은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이 투자에 자신의 능력을 10%도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투자 외적으로 그레이엄이 진심으로 빠졌던 문학가로서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는 그가 가장 잘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듯, 실패하고 때로는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16.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
미래 세대가 자신의 이름을 ‘상품준비통화 계획의 창안자’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정도로 이 계획이 정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의 얄팍한 경제학 지식은 그레이엄이 추구했던 정책 내용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OTL
에필로그1: 63세 때의 자화상
3자의 위치에서 63년을 살아온 그레이엄 자신을 객관적으로 조망합니다.
에필로그2: 80세 생일 연설
1974년 80세 생일 연설문에서 그가 닮고 싶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을 얘기하며, 그의 인생이 프랭클린의 성공과 비교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밝힙니다. 또한 자신이 추구했던 정신적인 즐거움에 대해 얘기하며 아이들이 배웠으면 합니다.
내가 일생 동안 누렸던 즐거움의 최소한 절반은 정신의 세계, 미와 문화, 특히 문학과 예술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상 무료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시작하기 위한 관심과 우리 앞에 펼쳐진 풍요를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손자 손녀 여러분, 가능하면 시작하기 위한 관심을 가지세요. 그리고 노력을 계속하세요. 일단 여러분이 그것-문화적인 삶-을 찾게 되면,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p.405)
■ 평가
찰리 멍거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룬 ‘전기(傳記 biography)’를 많이 읽는 ‘전기 애호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Poor Charlie’s Almanack in 2008, Jay Kim 번역본'에서 멍거는 위인전 예찬론을 펼칩니다.
나는 위인전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당신이 어떤 위대한 이론을 배우고 싶다면, 그 개념을 만든 사람을 친구로 만드세요. 마치 애덤 스미스를 친구로 두면 경제학 박사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위인전을 읽고 그들과 친구가 되세요. '돌아가신 위인'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이 우습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위인들의 좋은 생각은 당신의 삶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60대~70대의 그레이엄이 살아온 지난 날을 회상하며 쓴 회고록이지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어느 ‘자서전’에 못지않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레이엄이 어떻게 주식투자자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투자의 구루가 되었는지 주위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볼 수 있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다 된통 당하기도 하는, 실수하는 그레이엄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실수에서 배워 이겨내는 그레이엄을 보면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레이엄의 삶의 여정을 통해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의 갖가지 얘기들과 이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면서, 그레이엄이 투자의 스승을 넘어 인생의 스승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특히 좋았던 글귀
1916년 주식을 거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투기꾼(speculators)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금융거래와 경마 또는 다른 도박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다. (p.216)
오늘날은 모두가 투자자(investor)라고 부르는데, 정말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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