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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투자 전문 번역가 이건:좋은 투자서란?
[편집자 주]공부를 많이 하는 가치투자자들이라면 다양한 책을 통해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국내에 가치투자가 소개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터라 아직은 참고할 만한 책들 중에는 번역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투자자들에게 좋은 투자서들을 번역해주시는 번역가 이건(50)님을 만나 투자서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증권업계에서 오래 근무를 하신 이건님은 투자관련 이론과 실무에 모두 밝은 흔치 않은 경력의 번역가입니다.
지난 4월13일 번역가 이건님을 만나러 찾아간 곳은 서울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이었습니다.
요즘은 워렌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연차보고서 모음집을 재번역하느라 여념이 없으시답니다.
매일 도서관 열람실로 출근하신다는 이건님은 “자료도 풍부하고, 노트북PC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 나와 번역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번역가치고는 매우 전문적인 이력이 눈에 띄는 이건님은 어떻게 투자 전문 번역가로 변신을 하게 되었을까요?
“직장생활을 할 때 <마케팅 혁명과 DBM>이라는 책을 번역해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번역일을 해도 좋겠다 싶어서 틈틈이 번역관련 책들을 보곤 했어요.”
번역가라는 직업은 직장 생활을 그만 둘 경우 제2의 삶을 위한 플랜B 중 하나였던 거네요.
“번역 분야를 투자 쪽으로 잡은 것은 제가 투자 분야의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펀드매니저로 직접투자도 했고, 마케팅, 금융상품 개발 등 경험도 골고루 쌓았고요.”
‘투자의 고전을 소개하자’고 결심
이건님은 번역 일을 시작하면서 ‘시류에 영합하는 유행서를 피하고, 10~20년 후 읽어도 도움이 될 좋은 책을 번역하자’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국내 투자서들을 보면 단타 중심의 책들이 주류입니다. 국내에 가치투자가 소개된 것도 이제 겨우 10년밖에 안됐을 정도로 기업 가치에 주목하는 투자의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투자(번역)서가 많지 않아요.”
투자자들이 볼 만한 좋은 번역서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대략 5~6년 전쯤부터라고 합니다. 좋은 투자서의 양도 적었지만, 질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고 해요.
“예전에 나온 투자(번역)서들의 경우, 문학이나 에세이 등을 맡았던 사람들이 번역한 책들이 많아요. 이렇게 투자 분야를 잘 모르는 이들이 번역한 책들은 (번역상 오류가 날 가능성이 높아서) 독자들이 저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건님은 그래서 이미 번역된 책들이라 해도 번역의 품질이 별로라고 판단되면 재번역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직접 출판사에 “이 책을 (재)번역합시다”하고 먼저 제안하는 경우도 많답니다. 이런 번역가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보통은 출판사에서 출판할 만한 해외 원서들을 물색한 후 적당한 번역가들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거든요.
참고로, 이건님이 직접 발굴해 출판사에 번역을 제안한 책들로는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재번역), <증권분석 3판>, <행운에 속지마라>, <모든 주식을 소유하라>, <시장 변화를 이기는 투자> 등이 있습니다.
“실력 있고, 사심 없는 저자의 책을 읽자”
투자 공부를 할 때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을 고르는 요령에 대해 조언을 부탁드려 봤습니다. 이건님은 우선 “실력이 입증된 저자의 책을 찾아야 한다”고 하시네요.
“국내 투자서 저자들 가운데는 실력이 공인되지 않은 이들이 많아요. 또한 단기 투자 성과만을 갖고 투자 노하우를 알려준다는 저자들도 흔하죠. 진짜 실력을 보려면 10년 이상의 성과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국내 투자의 역사가 워낙 짧아서 그런 사례를 찾기 어렵죠. 그래서 투자 역사가 상대적으로 길었던 미국시장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저자의 책을 보는 것이 낫다고 할까요.”
이건님은 특히 “‘사심 없이’ 쓴 저자의 책을 골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워렌 버핏은 ‘이발사한테는 머리를 깎아도 되느냐고 묻지 말라’고 했습니다. 매출을 올려줄 손님을 그냥 가라고 할 이발사는 없다는 거죠. 국내에는 ‘이발사’ 같은 저자들이 너무 많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실력이 입증된 데다 사심도 없는 전문가들은 아주 드물거든요. 제가 주로 투자의 고전들을 찾아 번역하는 것은 사실 이런 이유가 커요.”
책이 잘 팔릴지의 여부는 출판사가 책을 낼 때의 중요한 결정 요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기 힘든 고전만 내기는 힘듭니다.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하는 거죠. 이건님은 “상업성과 책의 가치를 잘 고려해서 가끔은 출판사들이 상업성과 무관하게 투자의 고전을 내준다면 참 고마울 것 같다”며 웃으셨습니다.
<이건님이 번역하신 책들>
한글로 읽는 일반 독자들과 달리, 번역가로서 영어 원서들을 접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있을 법 합니다. 그래서 어떠셨냐고 물었더니 바로 사례가 술술 나오네요.
“국내 저자들이라고 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내용이 다 훌륭하진 않잖아요? 영어책도 똑같습니다. 저자가 실력과 문장력을 함께 갖춘 경우가 참 드물어요. 벤저민 그레이엄의 <증권분석 3판>은 번역하느라 아주 고생을 했어요. 그레이엄이 워낙 문체가 난해한 데다, 이 책이 대중서가 아니라 대학원 수업교재여서 내용도 어려웠거든요.”
일반적인 책은 번역하는 데 2개월 정도면 되는데, <증권분석 3판>은 무려 7개월쯤 걸렸다고 합니다.
원래 이 책은 미국에서 1951년에 출간된 책이라 철도산업이 각광받는 등 시대 상황도 달랐고, 법·제도 역시 요즘 시대와는 판이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답니다.
분량도 보통 책들은 250페이지 안팎인데, 이 책은 1000페이지쯤 될 정도로 두꺼웠고요.
“번역에 들어가 보니 너무 힘들어서 이걸 내가 왜 맡았나, 하고 후회도 했죠. 그레이엄 흉도 많이 봤어요(웃음). 이 책 번역하며 진이 하도 빠져서 한동안 업무 능률이 떨어져서 애를 먹었죠.”
이건님은 반면에 “책에서 배우는 것도 많고, 번역하기도 편했던 책도 있었다”며 실력과 문장력을 함께 갖춘 저자로 켄 피셔(필립 피셔의 아들)를 꼽으셨습니다. 피터 번스타인도 훌륭한 저자였다고 칭찬하셨어요.
(이건님은 켄 피셔의 책으로 <슈퍼 스톡스>와 <시장을 뒤흔든 100명의 거인들>을, 피터 번스타인의 책으로 <월스트리트로 간 경제학자>를 번역하셨습니다.)
이건님은 이어 이른바 ‘불량 번역서’에 대해 따끔한 한 마디도 하셨습니다. ‘사회에 암적인 존재’라고요.
“번역 자체가 엉터리이거나, 원서 저자의 글 솜씨나 실력이 부족한 경우, 불량한 번역서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책들은 사회에 암적인 존재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그런 투자서들은 독자들이 몇 장 넘겨보다가 책을 덮게 만들기 때문에 투자 공부에서 멀어지게 만들죠. 또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들에게도 매우 미안한 일이고요. 이런 책들이 의외로 많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펀드매니저 출신의 투자 전문 번역가인 이건님은 실제 본인의 투자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님은 “코스피 지수가 상승하는 정도의 수익률이면 만족한다”고 하시며 “주로 인덱스펀드에 자산을 넣어 굴린다”고 하셨습니다. 이건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어볼까요.
“투자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투자에 앞서 먼저 공격적 투자를 할지, 방어적 투자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병법서에 따르면 공격은 수비보다 3배의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요. 만일 코스피 지수 상승율 정도의 수익률을 원한다면 방어적인 투자를 하면 되고, 그 이상의 수익률을 바란다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야 합니다. 방어적 투자를 원하면 인덱스 투자를 하는 것이 좋아요. 품을 덜 들이면서 물가 상승에 방어하며 내 재산의 가치를 지킬 수 있어요. 하지만 공격 투자의 경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본인의 상황과 성향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해요.”
이건님은 “투자에 나서기 전에 공격이냐 방어냐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고 말했습니다.
시장에 ‘이발사’가 너무 많아
“사람들은 지수 상승률을 넘는 수익률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시장에 (버핏이 말했던) ‘이발사’가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 싶어요. 언론이나, ‘이발사’들이 쓴 책들이 자꾸 부채질을 하니까 다들 ‘투자하면 대박 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건님은 “투자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개인투자자들이 투자 실패로 패가망신하는 불행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끝으로 이건님은 공부하는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언젠가 가치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청중 가운데 50대쯤으로 보이는 어떤 분이 ‘투자할 때 공부를 꼭 해야 하는 거냐’고 진지한 얼굴로 저한테 물어보더군요. 아주 쇼킹했죠. 피터 린치는 ‘공부하지 않고 투자하는 것은 패를 안 보고 포커를 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공부가 싫으면 투자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노력 없이 수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건강한 몸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운동과 식사조절이 싫어도 해야 하는 법입니다. 투자도 마찬가지인거죠.”
글·사진 / 이혜경 한국투자교육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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