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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松商)의 후예들 - 태평양, 신도리코, 한일시멘트
송상(松商)의 후예들 - 태평양, 신도리코, 한일시멘트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인집단으로는 크게 두 집단이 있다. 유태상인과 화교상인이다. 경우에 따라서 인도상인이나 아랍상인을 추가로 꼽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적 네크워크나 규모면에서 유태상인이나 화교상인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두 집단의 상업적 능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유태인이나 화교들의 수난사는 유명하다. 두 민족 모두 타의에 의해 유랑생활을 해왔다. 조국이 멸망하면서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는 데마다 핍박을 받았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사회의 공적으로 지목되면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다.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하기 힘든 불안한 생활은 이들의 상업적 기질이 더욱 개발되도록 자극하는 원인이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야 했기 때문에 대농장을 경영하기 보다는 상업이나 금융업처럼 유동성이 좋은 품목을 다루는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같은 핍박의 역사는 이들 내부에 강력한 유대감을 심어 주었고, 이는 자연스레 상업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 외부의 핍박이 강해질수록 네트워크는 더욱 공고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네트워크내엔 노하우가 축적됐고, 자본은 계속 커져 이들은 세계를 누비는 거대한 상인집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송상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상인집단이 있다. '송상'이라 불리는 개성상인들이다. 송상은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개성에 근거를 두고 각종 상업 활동을 해온 상인들이다. 송도상인,개성상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송도란 고려 왕조의 수도 개성의 별칭이다. 개성은 고려 시대 정치적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번창한 상업 도시였다. 중국 사신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정부 무역과 중국 상인에 의한 민간 무역이 모두 발달했다.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벽란도는 예성강 입구 개성 근처에 위치한 국제 무역 항구로서 고려와 중국의 교역에 큰 기능을 했다. 이처럼 고려에는 개국 초부터 국내 상거래는 물론 송나라 등 외국과의 교역이 만개했는데, 이런 국내외 상업활동을 규모가 크고 상술이 앞선 개성상인이 주로 도맡았다.
조선시대에 들면서 고려왕조와 직간접적 관련을 맺고 있던 개성 사람들 중에는 벼슬길이 막히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정치에선 배제됐으나 고려때부터 탄탄히 쌓아온 상업적 노하우와 교양 지식을 앞세워 조선 상권 지배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는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고 시전에도 서울상인들에만 관수품과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독점적으로 줘서 송상들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송상들은 거대한 행상을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상술을 개발해 서울상인들과 경쟁했다. 결국 조선 중기 이후부터 개성은 다시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지방에 객주와 여각이 생겨나면서 송상의 상권은 전국으로 확대됐고 송방이라는 지점이 전국 주요 상업중심지 곳곳에 설치됐다. 송방마다 지점장격인 차인을 파견하여 지방 생산품을 수집하고 매매하도록 했다.
송상의 선구자적인 경영시스템
송상은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 오늘의 복식부기에 해당하는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기장법을 고안해 사용했다. 이 기장법의 독특한 점은 거래를 '사개'를 통해 기록한다는 점이다.사개란 원래 건축에서 쓰는 말로 '네 모퉁이가 서로 맞물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사개치부법에서는 거래기록에 꼭 필요한 요소, 즉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는 것, 받는 것 등 네 가지를 일컫는다. 사개치부법의 장부에는 각각 오늘날 서양부기의 분개장과 총계정원장에 해당되는 일기 장책 및 각종 보조장부가 따라붙었다.
서양부기에서는 현재의 거래를 장래의 채권과 채무로 표시한다. 이에 비해 사개치부법에서는 현재의 거래를 현재 주고받는 사실로 기록한다.때문에 기록이 쉽고, 그것이 동시에 장래의 채권과 채무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서양의 그것보다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복식부기가 고안될수 있었던 것은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신용·동업조직·위임·대리·화폐의 유통 등 다양한 상업관행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차인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개성 상공인들간에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일종의 수습제도다.부유한 집안의 자식이라도 반드시 다른 가문에 들어가 수년간 수습을 거친 뒤 가업을 이어받는 제도였다. '차인제'는 오늘날로 따지면 정식으로 취업하기 전에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일을 배워나가는 인턴쉽과 견줄만하다.
송상들은 '시변제도'라는 차원높은 금융제도도 갖고 있었다. 개성 상인은 원래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꺼리며 남에게 함부로 돈을 빌려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기네들 끼리는 보증인의 '신용'만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믿고 돈을 꿔주는 데 이게 바로 시변제도다. 신용도에 따라서 대출금에 매기는 이자율도 달리 책정됐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담보가 없이 신용만으로 돈을 빌려주기는 힘들다. 신용대출을 위해서는 신용도를 평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인들의 활동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송상들은 서로 많은 거래를 통해 자료를 축적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변제도 같은 선진 신용담보 대출 시스템이 작동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의 송상의 모습
개성상인들은 개항 전부터 이미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자본으로 성장해있었다. 개항 후 외국자본의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민간자본이 됐다. 이에 위협을 느낀 외국계 자본, 특히 일본은 인삼의 수출권을 빼앗으면서 송상조직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상들은 근대적인 기업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한말·일제시대에 걸쳐 개성의 거상으로는 손봉상, 공성학, 김정호, 박우현 등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영신사(1912), 개성사, 개성전기주식회사(1917), 고려삼업주식회사(1918), 송고실업장(1929) 등의 기업이 세워졌다.
송상의 전통을 계승한 기업들은 지금도 남아있다. 대표적인 회사로는 태평양, 신도리코, 한일시멘트 등이 있다. 이 3사는 창업자가 모두 개성 출신 월남 실향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가히 '송상의 후예들'이라고 할만한 놀라운 사업수완과 보수적인 경영을 자랑한다.이들의 창립연도는 태평양이 1959년, 신도리코의 전신인 신도교역이 1960년, 한일시멘트가 1961년이다. 보통 현대 기업의 수명을 10년 안팎으로 본다. 이는 IT기술이 발달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점차 짧아지고 있는 추세다. 40년이 넘도록 살아서 성장을 지속하는 기업들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장수의 비결은 송상의 전통을 현대 기업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돈으로 장사를 하지 않는다
세 기업의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일반기업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계정이 있다. 바로 부채다. 세 기업 모두 부채비율이 30%미만이다. 태평양과 신도리코는 이자를 내는 차입금이 전무하고 한일시멘트도 차입금 규모가 순자산의 10%에도 못미친다. 남의 돈으로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는 송상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 셈이다. 남의 돈으로 사업을 벌이면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게 되고, 혹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경우 큰 빚을 지게 된다는 게 송상들의 생각이었다. IMF를 전후로 수많은 재벌기업들이 쓰러져나갔는데도 유독 송상의 후예들만 꿋꿋이 살아남아 오히려 위기를 시장점유율 확대의 계기로 삼았던 사실은 이같은 무차입 경영 원칙 덕분이었다.
이들은 사업을 확장하고 싶을 때도 쌓아둔 이익잉여금 내에서 했다. 자신의 역량내에서만 새로운 투자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 회사는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이익을 고스란히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3사의 현금규모는 태평양 1943억원, 신도리코 1598억원, 한일시멘트 564억원에 달한다. 1~2개월내 현금화가 가능한 매출채권을 합할 경우 세회사의 현금은 천문학적 규모로 늘어난다. 숱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인 투자와 성장을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같은 현금때문이었다.
<3사의 재무구조>
둘째,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한우물 경영을 한다
온고지신은 옛것을 갈고닦아 새로운 것을 더욱 잘 알게 한다는 뜻의 한자성어다. 송상의 경영철학은 이 한마디속에 압축될 수 있다. 한가지 사업 아이템을 정했으면 끝까지 한우물만 파고, 혹시 다른 길로 나가더라도 머지않아 본업으로 돌아와 집중하는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태평양은 90년대초반 한때 사업다각화를 내걸고 화학산업과 무관한 분야에 마구잡이로 진출했다. 야구단 스포츠단, 증권사등 모두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다가 재무구조가 부실해졌다. 여기에 P&G, 유니레버, 로레알등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의 공세까지 겹쳐 큰 어려움에 처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이는 95년도에 취임한 서경배 사장이었다. 서 사장은 핵심역량에만 집중하겠다는 목표아래 비핵심사업을 정리하고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들을 과감히 잘라냈다. 취임 첫해인 95년 태평양 돌핀스의 매각을 신호탄으로 패션사업, 여자농구단 등을 차례로 정리했고, 이후 2001년까지 상호신용금고, 태평양 생명, 동방커뮤니케이션즈 등 기업의 핵심역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부분을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 태평양의 주가는 10배이상 오르면서 가치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과거 고 서성환 회장이 주도했던 70년대 초중반의 시장점유율 70% 시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신도리코의 경우 1999년과 2000년에 IT-인터넷 역풍을 맞은 적이 있다. 당시 정보-통신 관련 기기들을 만드는 회사의 주가가 폭등했는데 신도리코의 주가는 연일 폭락이었다. 신도리코의 주력제품군인 복사기, 팩시밀리 등이 종이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인터넷이 보급되면 급격히 사양길을 걸으리라는 예상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도리코는 IT추세에 편승하기보다는 복사기 기술을 더욱 개선, 오히려 프린터, 팩시밀리, 스캐너 등을 결합한 디지털 복합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여기에 오랫동안 개발해온 레이저 프린터의 대규모 수출건이 성사되면서 신도리코는 다시금 고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수천억원의 현금을 보유한 탓에 여기저기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신도리코는 인터넷 열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고스란히 현금을 지켜냈다. 오히려 아산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아날로그 기술을 디지털 시장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데만 힘을 기울였다.
한일시멘트 역시 한때 무리한 사업다각화로 다소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특히 시멘트와 관련없는 정보통신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실을 봤다.회사는 2002년 초 한일정보통신을 매각하고 12월에는 2차전지업체인 케이에프텍을 청산하는 등 최근 2년간 다시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일시멘트는 집중의 결과로 '레미탈'이라는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냈다. 레미탈은 시멘트, 모래, 특성강화제 등을 미리 혼합해 건축현장에 공급하는 시멘트 2차 제품 이다. 기존 시멘트에 비해 품질이 월등하고 공기가 단축됨은 물론 인건비 절감효과가 높아 98년 출시 이후 건설경기와 관계없이 매년 20% 이상씩 매출이 늘고 있다.
레미탈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기존 시멘트 작업에 비해 품질과 경제성이 뛰어 나고 작업이 한층 편리하다는 점 때문이다. 현장에서 물만 섞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과거 제품들은 시멘트와 모래를 따로 구입하고 모래를 체로 치는 등 복잡한 수작업을 거쳐야 했다.이에 비해 레미탈은 품질,작업시간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한 셈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제는 일반 건축현장에서 레미콘이 사용되는 골조공사를 제외 하고는 용도별로 모두 레미탈 제품을 사용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공사현장에서 레미탈의 시장점유율은 60%를 넘고 있으며 건축현장에서 는 보통명사처럼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브랜드파워를 갖고 있다.
셋째,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3사는 모두 강력한 다국적 업체가 존재하거나 수출이 힘든 상황에서 이를 극복했다. 국가경쟁력 차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나라 특산품인 인삼 수출 등을 통해 막대한 경쟁력을 확보한 송상들처럼 그 후예들도 세계속에서 경쟁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인삼을 개발,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태평양의 경우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국내 유명 화장품 시장에서 외국브랜드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싸워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태평양은 헤라, 라네즈, 설화수, 아이오페 등 연매출 천억원이 넘는 4개의 메가브랜드를 갖고 있다. 개별 브랜드의 매출액이 웬만한 중소 화장품회사의 매출을 훌쩍 뛰어넘는다. 브랜드 파워를 꾸준히 올려나가면서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주력한 결과 올해같은 불황속에서도 태평양은 플러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신도리코의 경우 창업이래 한번도 복사기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록스나 캐논처럼 미국과 일본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이 이미 복사기 시장을 완전히 평정하고 있다. 신도리코는 이런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서 한판승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삼성마저도 손을 들어버린 시장에서 신도리코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합쳐 50%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신도리코는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아날로그 시대의 대명사인 종이 복사기 업체에서 디지털 사무기기 업체로 변신에 성공했다. 직원의 20% 정도인 2백여명의 기술인력이 오랜 기간 축적해온 독자기술력 덕분에 복사기 제조 기술은 합작사인 리코사에 필적하거나 일부는 이미 리코사를 제친 상태이다. 이 외에도 IBM에서 분리된 렉스마크사에 대규모 레이저 프린터를 수출하고 있고, 리코사와는 추가적으로 디지털 복합기 3억달러 수출계약을 맺었다. 가히 세계속의 신도리코라 할만큼 양질 양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일시멘트 또한 레미탈을 수출품으로 육성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미 일본과 몽골에는 수출이 시작됐으며, 홍콩이나 중국, 러시아 등과도 수출협상을 벌이고 있다. 원래 시멘트는 수출이 거의 불가능한 품목으로 분류된다. 단가에 비해 부피와 중량이 지나치게 커서 물류비 부담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멘트 산업은 전형적인 내수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한일시멘트의 레미탈은 이 같은 인식을 뒤집었다. 고부가가치 시멘트를 통해 사람들이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국가간 물류비의 장벽을 뛰어넘어 시멘트를 수출 가능 품목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송상 정신을 계승할 새로운 '송상의 후예들'의 출현하길 바라며
다른 재벌계열사와 달리 별다른 잡음 없이 경영권 승계를 끝낸 점도 3사의 공통점이다. 우리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가 2세 경영자가 회사를 물려받은 뒤 무리한 사업 다각화와 차입경영을 통해 선대의 사업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던 것과는 달리 이들 송상의 후예들은 경영권이 바뀐 뒤에도 조용하지만 내실있는 경영을 통해 회사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현재까지 송상의 후예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선대의 유지를 성공적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모범이 될만한 기업이나 기업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한 때 돈을 벌었더라도 욕심 때문에 순식간에 몰락을 길을 걷거나 정경유착과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선 부자들, 특히 대기업 경영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선대에 좋은 이미지를 쌓고 우량한 재무구조를 만들어 놓았더라도 2대를 넘기지 못하고 회사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좋은 경영자만 있다면 기업은 한세대를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 한 세대를 넘어 계속기업으로 영구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영철학, 기업철학이다. 단순히 좋은 기업으로,우량한 회사로 남는 차원을 넘어 '위대한' 회사를 만들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그 기업의 경영철학이 뿌리가 돼줘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송상의 후예들은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민국 / kim@viptoo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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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인집단으로는 크게 두 집단이 있다. 유태상인과 화교상인이다. 경우에 따라서 인도상인이나 아랍상인을 추가로 꼽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적 네크워크나 규모면에서 유태상인이나 화교상인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두 집단의 상업적 능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유태인이나 화교들의 수난사는 유명하다. 두 민족 모두 타의에 의해 유랑생활을 해왔다. 조국이 멸망하면서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는 데마다 핍박을 받았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사회의 공적으로 지목되면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다.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하기 힘든 불안한 생활은 이들의 상업적 기질이 더욱 개발되도록 자극하는 원인이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야 했기 때문에 대농장을 경영하기 보다는 상업이나 금융업처럼 유동성이 좋은 품목을 다루는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같은 핍박의 역사는 이들 내부에 강력한 유대감을 심어 주었고, 이는 자연스레 상업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 외부의 핍박이 강해질수록 네트워크는 더욱 공고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네트워크내엔 노하우가 축적됐고, 자본은 계속 커져 이들은 세계를 누비는 거대한 상인집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송상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상인집단이 있다. '송상'이라 불리는 개성상인들이다. 송상은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개성에 근거를 두고 각종 상업 활동을 해온 상인들이다. 송도상인,개성상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송도란 고려 왕조의 수도 개성의 별칭이다. 개성은 고려 시대 정치적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번창한 상업 도시였다. 중국 사신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정부 무역과 중국 상인에 의한 민간 무역이 모두 발달했다.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벽란도는 예성강 입구 개성 근처에 위치한 국제 무역 항구로서 고려와 중국의 교역에 큰 기능을 했다. 이처럼 고려에는 개국 초부터 국내 상거래는 물론 송나라 등 외국과의 교역이 만개했는데, 이런 국내외 상업활동을 규모가 크고 상술이 앞선 개성상인이 주로 도맡았다.
조선시대에 들면서 고려왕조와 직간접적 관련을 맺고 있던 개성 사람들 중에는 벼슬길이 막히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정치에선 배제됐으나 고려때부터 탄탄히 쌓아온 상업적 노하우와 교양 지식을 앞세워 조선 상권 지배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는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고 시전에도 서울상인들에만 관수품과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독점적으로 줘서 송상들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송상들은 거대한 행상을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상술을 개발해 서울상인들과 경쟁했다. 결국 조선 중기 이후부터 개성은 다시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지방에 객주와 여각이 생겨나면서 송상의 상권은 전국으로 확대됐고 송방이라는 지점이 전국 주요 상업중심지 곳곳에 설치됐다. 송방마다 지점장격인 차인을 파견하여 지방 생산품을 수집하고 매매하도록 했다.
송상의 선구자적인 경영시스템
송상은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 오늘의 복식부기에 해당하는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기장법을 고안해 사용했다. 이 기장법의 독특한 점은 거래를 '사개'를 통해 기록한다는 점이다.사개란 원래 건축에서 쓰는 말로 '네 모퉁이가 서로 맞물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사개치부법에서는 거래기록에 꼭 필요한 요소, 즉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는 것, 받는 것 등 네 가지를 일컫는다. 사개치부법의 장부에는 각각 오늘날 서양부기의 분개장과 총계정원장에 해당되는 일기 장책 및 각종 보조장부가 따라붙었다.
서양부기에서는 현재의 거래를 장래의 채권과 채무로 표시한다. 이에 비해 사개치부법에서는 현재의 거래를 현재 주고받는 사실로 기록한다.때문에 기록이 쉽고, 그것이 동시에 장래의 채권과 채무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서양의 그것보다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복식부기가 고안될수 있었던 것은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신용·동업조직·위임·대리·화폐의 유통 등 다양한 상업관행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차인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개성 상공인들간에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일종의 수습제도다.부유한 집안의 자식이라도 반드시 다른 가문에 들어가 수년간 수습을 거친 뒤 가업을 이어받는 제도였다. '차인제'는 오늘날로 따지면 정식으로 취업하기 전에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일을 배워나가는 인턴쉽과 견줄만하다.
송상들은 '시변제도'라는 차원높은 금융제도도 갖고 있었다. 개성 상인은 원래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꺼리며 남에게 함부로 돈을 빌려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기네들 끼리는 보증인의 '신용'만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믿고 돈을 꿔주는 데 이게 바로 시변제도다. 신용도에 따라서 대출금에 매기는 이자율도 달리 책정됐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담보가 없이 신용만으로 돈을 빌려주기는 힘들다. 신용대출을 위해서는 신용도를 평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인들의 활동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송상들은 서로 많은 거래를 통해 자료를 축적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변제도 같은 선진 신용담보 대출 시스템이 작동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의 송상의 모습
개성상인들은 개항 전부터 이미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자본으로 성장해있었다. 개항 후 외국자본의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민간자본이 됐다. 이에 위협을 느낀 외국계 자본, 특히 일본은 인삼의 수출권을 빼앗으면서 송상조직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상들은 근대적인 기업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한말·일제시대에 걸쳐 개성의 거상으로는 손봉상, 공성학, 김정호, 박우현 등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영신사(1912), 개성사, 개성전기주식회사(1917), 고려삼업주식회사(1918), 송고실업장(1929) 등의 기업이 세워졌다.
송상의 전통을 계승한 기업들은 지금도 남아있다. 대표적인 회사로는 태평양, 신도리코, 한일시멘트 등이 있다. 이 3사는 창업자가 모두 개성 출신 월남 실향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가히 '송상의 후예들'이라고 할만한 놀라운 사업수완과 보수적인 경영을 자랑한다.이들의 창립연도는 태평양이 1959년, 신도리코의 전신인 신도교역이 1960년, 한일시멘트가 1961년이다. 보통 현대 기업의 수명을 10년 안팎으로 본다. 이는 IT기술이 발달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점차 짧아지고 있는 추세다. 40년이 넘도록 살아서 성장을 지속하는 기업들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장수의 비결은 송상의 전통을 현대 기업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돈으로 장사를 하지 않는다
세 기업의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일반기업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계정이 있다. 바로 부채다. 세 기업 모두 부채비율이 30%미만이다. 태평양과 신도리코는 이자를 내는 차입금이 전무하고 한일시멘트도 차입금 규모가 순자산의 10%에도 못미친다. 남의 돈으로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는 송상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 셈이다. 남의 돈으로 사업을 벌이면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게 되고, 혹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경우 큰 빚을 지게 된다는 게 송상들의 생각이었다. IMF를 전후로 수많은 재벌기업들이 쓰러져나갔는데도 유독 송상의 후예들만 꿋꿋이 살아남아 오히려 위기를 시장점유율 확대의 계기로 삼았던 사실은 이같은 무차입 경영 원칙 덕분이었다.
이들은 사업을 확장하고 싶을 때도 쌓아둔 이익잉여금 내에서 했다. 자신의 역량내에서만 새로운 투자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 회사는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이익을 고스란히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3사의 현금규모는 태평양 1943억원, 신도리코 1598억원, 한일시멘트 564억원에 달한다. 1~2개월내 현금화가 가능한 매출채권을 합할 경우 세회사의 현금은 천문학적 규모로 늘어난다. 숱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인 투자와 성장을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같은 현금때문이었다.
둘째,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한우물 경영을 한다
온고지신은 옛것을 갈고닦아 새로운 것을 더욱 잘 알게 한다는 뜻의 한자성어다. 송상의 경영철학은 이 한마디속에 압축될 수 있다. 한가지 사업 아이템을 정했으면 끝까지 한우물만 파고, 혹시 다른 길로 나가더라도 머지않아 본업으로 돌아와 집중하는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태평양은 90년대초반 한때 사업다각화를 내걸고 화학산업과 무관한 분야에 마구잡이로 진출했다. 야구단 스포츠단, 증권사등 모두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다가 재무구조가 부실해졌다. 여기에 P&G, 유니레버, 로레알등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의 공세까지 겹쳐 큰 어려움에 처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이는 95년도에 취임한 서경배 사장이었다. 서 사장은 핵심역량에만 집중하겠다는 목표아래 비핵심사업을 정리하고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들을 과감히 잘라냈다. 취임 첫해인 95년 태평양 돌핀스의 매각을 신호탄으로 패션사업, 여자농구단 등을 차례로 정리했고, 이후 2001년까지 상호신용금고, 태평양 생명, 동방커뮤니케이션즈 등 기업의 핵심역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부분을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 태평양의 주가는 10배이상 오르면서 가치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과거 고 서성환 회장이 주도했던 70년대 초중반의 시장점유율 70% 시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신도리코의 경우 1999년과 2000년에 IT-인터넷 역풍을 맞은 적이 있다. 당시 정보-통신 관련 기기들을 만드는 회사의 주가가 폭등했는데 신도리코의 주가는 연일 폭락이었다. 신도리코의 주력제품군인 복사기, 팩시밀리 등이 종이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인터넷이 보급되면 급격히 사양길을 걸으리라는 예상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도리코는 IT추세에 편승하기보다는 복사기 기술을 더욱 개선, 오히려 프린터, 팩시밀리, 스캐너 등을 결합한 디지털 복합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여기에 오랫동안 개발해온 레이저 프린터의 대규모 수출건이 성사되면서 신도리코는 다시금 고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수천억원의 현금을 보유한 탓에 여기저기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신도리코는 인터넷 열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고스란히 현금을 지켜냈다. 오히려 아산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아날로그 기술을 디지털 시장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데만 힘을 기울였다.
한일시멘트 역시 한때 무리한 사업다각화로 다소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특히 시멘트와 관련없는 정보통신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실을 봤다.회사는 2002년 초 한일정보통신을 매각하고 12월에는 2차전지업체인 케이에프텍을 청산하는 등 최근 2년간 다시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일시멘트는 집중의 결과로 '레미탈'이라는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냈다. 레미탈은 시멘트, 모래, 특성강화제 등을 미리 혼합해 건축현장에 공급하는 시멘트 2차 제품 이다. 기존 시멘트에 비해 품질이 월등하고 공기가 단축됨은 물론 인건비 절감효과가 높아 98년 출시 이후 건설경기와 관계없이 매년 20% 이상씩 매출이 늘고 있다.
레미탈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기존 시멘트 작업에 비해 품질과 경제성이 뛰어 나고 작업이 한층 편리하다는 점 때문이다. 현장에서 물만 섞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과거 제품들은 시멘트와 모래를 따로 구입하고 모래를 체로 치는 등 복잡한 수작업을 거쳐야 했다.이에 비해 레미탈은 품질,작업시간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한 셈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제는 일반 건축현장에서 레미콘이 사용되는 골조공사를 제외 하고는 용도별로 모두 레미탈 제품을 사용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공사현장에서 레미탈의 시장점유율은 60%를 넘고 있으며 건축현장에서 는 보통명사처럼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브랜드파워를 갖고 있다.
셋째,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3사는 모두 강력한 다국적 업체가 존재하거나 수출이 힘든 상황에서 이를 극복했다. 국가경쟁력 차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나라 특산품인 인삼 수출 등을 통해 막대한 경쟁력을 확보한 송상들처럼 그 후예들도 세계속에서 경쟁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인삼을 개발,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태평양의 경우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국내 유명 화장품 시장에서 외국브랜드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싸워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태평양은 헤라, 라네즈, 설화수, 아이오페 등 연매출 천억원이 넘는 4개의 메가브랜드를 갖고 있다. 개별 브랜드의 매출액이 웬만한 중소 화장품회사의 매출을 훌쩍 뛰어넘는다. 브랜드 파워를 꾸준히 올려나가면서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주력한 결과 올해같은 불황속에서도 태평양은 플러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신도리코의 경우 창업이래 한번도 복사기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록스나 캐논처럼 미국과 일본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이 이미 복사기 시장을 완전히 평정하고 있다. 신도리코는 이런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서 한판승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삼성마저도 손을 들어버린 시장에서 신도리코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합쳐 50%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신도리코는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아날로그 시대의 대명사인 종이 복사기 업체에서 디지털 사무기기 업체로 변신에 성공했다. 직원의 20% 정도인 2백여명의 기술인력이 오랜 기간 축적해온 독자기술력 덕분에 복사기 제조 기술은 합작사인 리코사에 필적하거나 일부는 이미 리코사를 제친 상태이다. 이 외에도 IBM에서 분리된 렉스마크사에 대규모 레이저 프린터를 수출하고 있고, 리코사와는 추가적으로 디지털 복합기 3억달러 수출계약을 맺었다. 가히 세계속의 신도리코라 할만큼 양질 양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일시멘트 또한 레미탈을 수출품으로 육성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미 일본과 몽골에는 수출이 시작됐으며, 홍콩이나 중국, 러시아 등과도 수출협상을 벌이고 있다. 원래 시멘트는 수출이 거의 불가능한 품목으로 분류된다. 단가에 비해 부피와 중량이 지나치게 커서 물류비 부담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멘트 산업은 전형적인 내수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한일시멘트의 레미탈은 이 같은 인식을 뒤집었다. 고부가가치 시멘트를 통해 사람들이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국가간 물류비의 장벽을 뛰어넘어 시멘트를 수출 가능 품목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송상 정신을 계승할 새로운 '송상의 후예들'의 출현하길 바라며
다른 재벌계열사와 달리 별다른 잡음 없이 경영권 승계를 끝낸 점도 3사의 공통점이다. 우리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가 2세 경영자가 회사를 물려받은 뒤 무리한 사업 다각화와 차입경영을 통해 선대의 사업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던 것과는 달리 이들 송상의 후예들은 경영권이 바뀐 뒤에도 조용하지만 내실있는 경영을 통해 회사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현재까지 송상의 후예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선대의 유지를 성공적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모범이 될만한 기업이나 기업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한 때 돈을 벌었더라도 욕심 때문에 순식간에 몰락을 길을 걷거나 정경유착과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선 부자들, 특히 대기업 경영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선대에 좋은 이미지를 쌓고 우량한 재무구조를 만들어 놓았더라도 2대를 넘기지 못하고 회사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좋은 경영자만 있다면 기업은 한세대를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 한 세대를 넘어 계속기업으로 영구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영철학, 기업철학이다. 단순히 좋은 기업으로,우량한 회사로 남는 차원을 넘어 '위대한' 회사를 만들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그 기업의 경영철학이 뿌리가 돼줘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송상의 후예들은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민국 / kim@viptoo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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