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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사검사가 33년 만에 밝힌 실미도 사건의 眞實
"영화 '실미도'의 歪曲을 밝힌다"
영화 ‘실미도’는 1971년 발생한 684특수부대의 난동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수사 책임자(공군 검찰부장)였던 김중권 전 민주당 대표는 영화가 흥미 위주로 美化됐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김 전 대표는 ‘월간중앙’과 단독으로 만나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최초로 털어놨다. 그는 영화가 국가에 대한 불신을 높이고 국가관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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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병들 집단사살하라는 국가 명령은 없었다”
■ “난동자들을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義人처럼 묘사한 것은 심각한 왜곡”
■ “훈련병들은 사형수 아닌 대전역 부근에서 공개모집한 건달들”
■ “난동 사건은 비인간적 대우에 따른 우발적 범행”
■ “여교사 겁간한 2명은 현장에서 즉결처형됐다”
■ “난동자 중 4명 생존, 그후 군사법정에서 사형 집행”
■ “교육대장은 자살 아닌 난동자들에게 무차별 사살돼”
■ “국가가 훈련병들의 주민등록 없앴다는 내용은 사실무근”
■ 사형수들의 유언 “김일성 모가지에 총구멍 못 내고 가는 것이 恨”
■ 정부에서 사형수들 베트남전에 보내는 방안 논의도
■ 실미도 사건은 분단과 냉전의 비극적 산물
영화 ‘실미도’의 기세가 폭주하는 기관차 같다. 지난해 12월24일 개봉한 이래 관객이 벌써 6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런 기세라면 1,000만명 돌파도 시간 문제라는 것이 충무로 주변의 분석이다.
영화 ‘실미도’는 1971년 8월23일 발생한 실미도 684부대 훈련병들의 난동 내지는 반란을 다뤘다. 실미도 사건은 공식 군대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고,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전하는 실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사건의 명확한 실체는 어둠 속에 있다. 영화에서 이를 복원시킨 것이 큰 관심을 끈 것으로 보인다.
영화 ‘실미도’는 국가폭력의 비정함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냉담한 권력에 맞선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저항도 담겨 있다. 저항 과정에서 그들은 원초적 인간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학자 카(E. H. Carr)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사실을 해석한 것이 역사”라고 말했다. 실미도 사건이 났을 때는 남북이 극단의 대치를 하고 있던 상황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면 우리도 김일성 주석궁을 박살내는 것이 옳은 시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악수하고, 기업인들이 자유로이 북한을 방문한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실미도의 684부대가 왜 필요했는지, 그런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부대를 유지하고 부대원들을 ‘살인병기’로 훈련시켰다는 것이 사실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역사를 다시 해석하고 보면서 우리는 오늘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실과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버려진 역사를 냉동실에서 꺼내온 영화의 경우도 이를 비껴갈 수는 없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할 수 있으되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미도’는 비록 픽션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실화를 소재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묘하게 다큐멘터리가 아님에도 마치 그런 것인 양 치장하고 있다. 영화 말미에 이 영화를 당시 사건 관계자들에게 바친다는 헌사를 섞어 넣어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또 사건 관계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그리 오래지 않은 때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이해관계와 법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도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재미있는 영화’라거나 ‘남성들의 인간적 체취와 의리’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자칫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재미는 있지만 난동자들을 너무 미화시켰다”
영화 ‘실미도’는 국가폭력의 부당성을 부각시키고, 관객은 그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객이 느끼는 이런 분노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영화적 사실이 잘못됐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는 영화에서처럼 정말 자국 국민의 주민등록을 없애 버리고 심지어 모두 제거하라고 명령했을까.
최근 영화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실미도 사건의 진상에 관한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실미도 684부대 소대장이었던 김방일(영화에서 조중사) 씨가 증언하기도 했고, 그 외 생존자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의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김중권(金重權·65·전 대통령비서실장) 전 민주당 대표만큼 실미도 사건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김 전 대표는 당시 공군 검찰부장으로서 실미도 사건뿐 아니라 684부대가 만들어진 배경, 실미도 반란의 원인 등 실미도 사건 전반을 수사했다. 그는 실미도 사건이 난 다음날 헬기를 타고 실미도 현장으로 ‘현장검증’을 간 것을 시발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월간중앙’에 처음으로 실미도 사건의 수사 기록을 털어놨다. 실미도 사건의 전말이라고 할 정도로 기록이 방대했다고 그는 전했다. 33년이 지났건만 그의 기억은 또렷했다. 워낙 끔찍하고 참혹했던 사건이어서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진상을 듣기에 앞서 지난 1월8일 김중권 전 대표와 오후 8시5분부터 서울 정동 스타식스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 ‘실미도’를 봤다. 영화가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영화가 긴박하게 돌아가서인지 2시간여가 훌쩍 지났다.
영화가 끝난 후 김 전 대표는 “영화를 잘 만들었고, 재미는 있지만 너무 미화시켜 놨다”고 몇 번을 혼잣말로 되뇌었다. 영화가 끝나고 약 1시간 가량 스타식스 내 커피숍에서 영화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날인 1월9일 오후 김 전 대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두 시간 가량 기자를 만나 사건의 진상을 털어놨다.
당시 수사 검사부장으로서 김 전 대표는 남다른 감회를 피력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영화가 군(軍) 난동자들을 너무 미화시켜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했다. 당시 사건 관계자들이 재판받고 사형된 마당에 그들을 미화함으로써 국가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가 비록 허구이기는 하지만 사실에 바탕한 영화이면서도 너무 많은 점에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영화 스태프들이 영화 제작 전에 문의해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거듭 아쉬움을 표명했다. 스태프들이 문의해 왔으면 이런 잘못은 바로잡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 처음으로 실미도에 관해 입을 여는데요. 김 전 대표께서는 실미도 사건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실미도’라는 영화가 큰 화제를 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써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윤기자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와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당시 나는 공군 법무관으로, 검찰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 전반에 관해 수사했고, 난동자들 4명에 대한 사형 집행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모 신문사에서 실미도 사건에 대해 물어온 적이 있지만, 그 때는 자세하게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1년 전쯤에는 일본 ‘도쿄(東京)신문’에서 관심을 갖고 취재하길래 몇 가지 말해준 적은 있습니다.
실미도 사건은 분단국가의 비극적 사건이자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영화를 보니 새삼스럽습니다만 너무 난동자들을 미화하고, 흥미위주로 만들어 역사가 왜곡된 듯해 안타깝습니다.”
─ 영화는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은 듭니다.(웃음) 재미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수사했던 사람이 보기에는 흥미 위주로 해놓은 것 같습니다. 너무 사실과 다릅니다. 그런데 제가 실미도 사건의 진실을 말하게 되면 영화가 망하는 것 아닙니까.(웃음) 또 당시 유가족 중에서는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국가배상을 요구하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제가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뒤바뀌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난동자들을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의인(義人)들처럼 묘사해 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일면 이해합니다만, 당시 상황에서 국가가 그런 부대를 필요로 했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진압군들이 버스 안에서 난동자들의 시신을 끌어내고 있다.(위) 1971년 8월23일 오후 진압군들이 서울 도심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량을 통제하고있다.
1968년 4월에 만들었다고 해서 684부대로 命名
진압군들이 버스 안에서 난동자들의 시신을 끌어내고 있다.(위) 1971년 8월23일 오후 진압군들이 서울 도심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량을 통제하고있다.
김 전 대표는 사건 당일과 실미도로 현장검증을 갔던 때를 회고했다. “실미도 특수부대 명칭이 684부대인데 1968년 4월에 부대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김신조 일당 31명이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하자 보복 차원에서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만든 것이죠.
1971년 8월23일 저는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에서 검찰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급히 찾더라고요. 무장괴한들이 서울에 침투해 난동을 부렸는데, 그들이 실미도 특수부대 요원으로, 공군 소속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수사를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곧바로 헬기를 타고 실미도로 갔습니다. 처참하더군요. 막사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어떤 기간병은 개펄에서 죽었는데 도망가다 사살당한 겁니다.
실미도에는 평양 거리와 주석궁 모형이 만들어져 있더군요. 이날부터 생존한 난동자들 4명에 대해 1972년 4월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장장 8개월 동안 실미도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684부대 훈련병들은 대부분 사형수거나 흉악범들이다. 684부대 창설자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회고록에서 ‘각 군 형무소에서 사형수나 무기수로 극형에 처해져 복역하던 죄수들을 특수결사대원으로 선발했다’고 밝혔다. 신체조건이 좋고 자포자기적인 투쟁심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김중권 전 대표는 이것부터 사실과 다르다고 증언했다.
“훈련병 중에는 재소자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수사한 바로는 훈련병들을 모집했습니다. 특히 대전역 부근의 건달들이 주요 대상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전과 기록 말소 등과 같은 보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화에서처럼 흉악범이나 사형수들을 잡아다 훈련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 영화에서 보면 교육대장(안성기)은 냉혹한 군인이지만 인간적인 면이 있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훈련병들도 죽음을 초월해 의리 있는 사나이들로 묘사돼 있습니다. 결국 장렬하게 자폭하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과 실제 인물들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영화이니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교육대장은 아주 무서운 인물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원래 계급은 상사였는데, 아마 대위 계급장을 달고 다녔던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자 교육대장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난동자들에게 사살됐습니다. 여러 발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난동자들이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모두 수류탄을 까고 자폭한 것으로 나오던데, 그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생존자가 있을 수 없죠. 무장한 난동자들은 청와대로 진격하려고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합니다.
진압군이 앞에서 저지하자 몰고 온 버스를 급커브하려다 운전 미숙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았으며, 그때 수류탄 한 발이 터집니다. 그래서 난동자들 대부분이 죽고, 4명만 생존합니다. 이들도 결국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1972년 4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여교사 겁간한 2명의 훈련병은 현장에서 사살”
영화에서는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작전이 취소된 후 훈련병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불만이 높아진다. 그러던 중 2명의 훈련병이 탈영해 실미도 옆 유인도로 건너가 초등학교 여교사를 겁간한다. 수색대가 덮쳐오자 이들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한 명만 죽고, 나머지 한 명은 부대원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사실은 어떠했을까. 그런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현장에서 사살됐다는 것이 김 전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영화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렇게 처리했겠지만, 그건 엉터리”라고 말했다.
“실미도 옆에 유인도가 있는데, 그곳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훈련병 중 2명이 부대를 이탈해 그곳으로 가 여교사를 겁간했습니다. 그들은 수색대에 의해 현장에서 즉결처형됐습니다. 영화처럼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처형된 탈영병들은 화장됐습니다. 훈련병들은 화장한 유골을 바다에 뿌리며 배신 행위를 규탄함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합니다.”
─ 아무리 군번 없는 훈련병들이지만, 그렇게 즉결처형할 수 있는 것입니까.
“원칙대로라면 재판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는 전시상황이라고 교육대장이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곳은 대한민국 영토지만 영토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됐던 것 같습니다. 교육대장에게 생사여탈권이 쥐어져 있던 셈이죠.”
684부대를 중앙정보부가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도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재가를 받아 내가 특수결사대를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왜 684부대를 공군에 배속했는지에 대해서는 의혹으로 남아 있다. 일부 방송과 언론은 부대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기 위해 공군에 배속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영화에서도 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고, 교육대장이 공군 소장을 찾아가 훈련병들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으며, 공군 소장은 자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이에 대한 김중권 전 대표의 설명이다.
“중앙정보부가 684부대를 만들고 컨트롤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부대를 공군에 배속한 것은 무엇을 숨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공군에는 실명을 밝힐 수 없지만, 대북 정보를 담당하는 첩보 능력이 뛰어난 정보부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부대 예하 부대로 배속한 것입니다. 부대를 만들 당시에는 중앙정보부가 고도의 전략적 입장에서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입니다.”
영화 ‘실미도’의 사실 여부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점은 과연 국가가 훈련병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실미도 반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을 ‘국가의 제거 명령’에서 찾고 있다. 바꿔 말해 이런 명령이 없었다면 실미도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부분에 대해 영화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내용을 잠시 감상해 보자.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작전이 취소된 후 인간병기로 단련된 훈련병들의 사고 위험이 높아지자 교육대장은 지휘부를 찾아가 조치를 요구한다. 그러나 권력의 실세(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측되는 인물)는 교육대장에게 권총까지 들이대며 “국가는 훈련병들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고 위협한다. 교육대장은 실미도로 돌아와 간부들과 훈련병 제거 계획을 모의하고, 이를 엿들은 훈련병이 기간병들을 기습한다. 그들은 실미도를 빠져나와 박정희를 만나겠다며 청와대로 진격하다 몰살당한다.
“부대원들에 대한 국가의 사살 명령은 없었다”
이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야만적인 국가권력에 적개심을 갖게 될 것이다. 정당하게 행사돼야 할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었기 때문이다. 이를 사실로 믿을 경우 국민의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영화가 픽션이라지만 이 부분의 실체적 진실 여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국가의 제거 명령’의 실체에 대해 수사 책임자였던 김 전 대표에게 몇 차례나 물었다.
─ 영화는 실미도 난동의 직접 원인이 국가의 제거 명령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영화를 봐서 아시겠지만 훈련병들이 사살될 위기에 처하자 일종의 정당방위로 기습을 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진짜 사살 명령이 있었습니까.
“국가가 684부대 훈련병들을 없애라고 명령을 내린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조사 과정에서 명백히 밝혀진 것입니다. 그날 사건은 비인간적 대접과 가혹한 훈련에 따른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났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사전 모의는 없었습니다.”
당시 실미도 684부대 교관 중 한 명인 김방일 씨도 사살 명령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영화에서 부대원들이 교관들을 죽이고 탈출하기 전, 출장가는 바람에 혼자 살아남은 조중사(허준호 분)로 나온다. 그는 1월12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극적 효과를 내려다 보니 영화 내용은 과장된 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와 달리 상부의 사살 명령 같은 것은 없었어요. 훈련병들이 나날이 보급 여건이 열악해지는 것을 견디다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탈출했던 것이죠.”
─ 원래 사건이란 직접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1971년 8월23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훈련병과 기간병 간의 마찰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그날 특별한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다만 그날도 훈련병들이 기간병들에게 심한 기합을 받았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실미도 사건은 누적된 불만이 쌓이고, 곪아 터진 것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훈련병들은 1969년 4월 실미도로 들어온 이후 장기간 고도의 훈련과 비인간적 대접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훈련은 힘들더라도 보급품 등은 특수부대답게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중간에서 보급품을 떼어먹는 경우가 생겨 대접이 열악해졌습니다. 훈련병들은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침투 작전 지시는 없지, 훈련은 고되지, 여기에 보급품까지 줄어드니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적절한 기회(평양침투 작전)를 주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제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저의 조사를 토대로 나중에 보급품을 떼어먹은 상급자들이 징계받기도 했습니다.”
─ 영화에서는 훈련병의 등을 인두로 지지거나 바닷속에 처박아 놓고 머리를 내미는 훈련병에게는 사격하는 등 마치 고문하듯 가혹한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습니까.
“그런 방법들이 동원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고의 특수부대원이 되도록 ‘날카롭게’ 훈련시킨 것은 확실합니다. 이를테면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서 떼밀어 밑으로 구르도록 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 교관들이 공중에 수십 개의 깡통을 던지면 떼굴떼굴 구르는 와중에도 그 깡통들을 모두 명중시킵니다. 탁월한 저격수들이지요.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겠습니까.”
─ 훈련병들이 실미도에 들어간 다음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3년4개월여 동안 한 번도 외부로 나간 적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한번 단체로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인천 사창가로 데려가 성적 욕구를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훈련병들, 주민등록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
훈련병들이 군번이 없는 군인 신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들의 주민등록도 없애버려 존재 자체가 없는 ‘유령’으로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거될 것이라고 박중사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훈련병들은 실제로 국적 없는 ‘유령’들이었던 것인가. 김 전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주민등록을 없애 버렸다는 것도 과장입니다. 영화에서는 이들을 국민 대접도 못 받는 ‘1회용 인간’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주민등록에 올라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었습니다. 국가의 횡포를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사실과 다릅니다.”
실미도 사건은 군 난동, 또는 반란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가, 정부 또는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하위 집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반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684부대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만들어졌음은 앞서 밝혔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 간에는 해빙 무드가 조성된다. 이런 화해 무드의 중심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추론이지만 이후락에게 전임 김형욱 부장이 만든 684부대는 쓸모없는 인간병기들로 인식됐을 수 있다. 이는 김형욱의 회고록에도 나타나 있다. 그 대목을 옮겨보자.
‘사건 발생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은 선거 치르는 데 정신이 없었고, 게다가 박정희의 밀명을 받아 북한과의 교섭을 추진하고 있었던만큼 특공결사대에 대해 소홀히 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 전대표도 비슷하게 증언했다. 국가가 부대를 방치함으로써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훈련병을 모집할 때 주었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면 비극적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684부대는 골칫거리가 됐던 것이 사실입니다. 정부로서도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훈련병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습니다.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이 공군 소장에게 부대 처리 문제를 항의하는데, 실제로는 전대장(육군의 연대장급에 해당하는 공군 부대장으로 대령급)에게 몇 번이나 작전(평양 습격)을 수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전대장은 ‘국가적인 것이어서 전대장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며 교육대장을 돌려보냈습니다.”
항간에는 중앙정보부가 생존한 난동분자 4명에게“베트남전에 보내주겠다”며 항소 포기를 종용해 놓고, 1심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형을 집행했다는 설이 있다. 영화에서는 모두 자폭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생존자 자체가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또한 국가권력의 부도덕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재판받을 권리를 국가에 의해 탈취당한 채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표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생존한 4명에 대해 재판이 진행됐고, 4명 모두 항소까지 했다가 기각당해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상고한다고 해도 판결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알아서 한 것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중앙정보부나 그 어떤 권력기관의 압력도 없었습니다. 다만 정부가 한때 이들을 활용하기 위해 전략적인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 정부 일부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들을 사형시키는 것은 아까우니 월남전에 보내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특수살인 범법자들을 다시 국가에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많아 없던 일이 됐습니다.”
─ 이들은 군번도 없는데 왜 군사법정에서 재판받은 것입니까.
“원래 군인들만 군사재판을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들 난동자는 문서에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군에 배속돼 군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군인으로 본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훈련할 때 소위 계급장(군번 없는)을 달아 주기도 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사형수들과 가까워지기도”
인터뷰 도중 난동분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쪽으로 화제가 옮겨가자 김 전 대표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 것인지, 아니면 죄의 유무를 떠나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의 순간인지…. 김 전 대표가 수사하면서 훈련병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접을 알고 이에 분개하고, 사형수들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더니 그는 “모두에게 안타깝고도 고통스러운 사건”이라고만 짤막하게 말했다.
─ 생존한 난동자들 4명에 대한 수사나 결과에 대해서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수사 및 재판 과정을 설명해 주시죠.
“실미도 현장검증을 다녀온 후부터 본격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사항을 조사했습니다. 난동자들은 공군 구치소에 수감했습니다. 만나보니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습니다. 고등군법회의에서 항소를 기각하자 이들은 모두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상고해도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 사형 집행 현장에도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그는 다시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형이 확정된 후 1972년 4월께 국방부에서 공군본부로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군인은 국방부 장관이 사형 명령을 내립니다. 형 집행 장소를 어디로 할까 하다 오류동 뒷산으로 정했습니다. 공군 교범에 따르면 검찰부장이 사형 집행을 지휘하도록 돼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사형수에 3명의 저격병이 집행하는데 사형수가 4명이어서 모두 12명의 저격병을 차출했습니다.
정당한 법 집행이지만 ‘사람을 죽였다’고 자책할까봐 저격병들을 모아 놓고 ‘너희가 가진 실탄 중 하나는 공포탄’이라고 했습니다. 집행 현장에 먼저 가 있는데 사형수들을 태운 차가 왔습니다. 헌병대장이 ‘너희는 민간 교도소로 이감된다’고 하고 검은 천으로 덮은 차를 타고 현장까지 온 것입니다. 한 명씩 뛰어내리는데, 한 사형수가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쳐 깜짝 놀랐습니다.
결박한 후 제가 한 사람씩 마지막 유언을 듣는데, 한 명이 ‘김일성 모가지에 총구멍을 내지 못하고 가는 게 한스럽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최후진술에서도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지도 않았으며, 예상보다 의연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끝나고 저는 그해(1972년) 5월 말에 예편했습니다.”
─ 일부에서는 생존한 난동자들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간병들을 몰살하고 육지로 나왔을 때 청와대행에 합류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4명 외에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만약 잔당이 있었다면 국가가 어떻게 해서든 잡아들였을 것입니다. 특수살인자들인데 어떻게 그대로 둘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물론 공소시효가 끝났지만 그런 일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영화 ‘실미도’를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냉전 시대의 상황을 영화로 그려 놓았는데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민족의 어려운 남북 대치를 이해하면서도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특수훈련에 의해 인간병기가 만들어지고, 그들을 국가가 방치한 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국가가 이들을 잘 관리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부만 탓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북한을 깨 부수는 것이었고, 그것이 국민의 염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시각으로 부대를 만든 것 자체가 잘못 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가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국가와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말하는 실미도 사건
“684부대는 박정희 재가받아 내가 만들었다”
실미도 684부대는 중앙정보부에서 창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부대는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만들었다. 이 같은 사실은 김형욱의 육성(肉聲) 회고록인 ‘혁명과 우상’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돼 있다. 이 책은 김경재 현 민주당 의원이 미국에서 김형욱을 27개월 동안 취재해 지난 1984년 출판해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김형욱이 육성으로 전하는 실미도 사건의 진상이다.
일련의 혼돈 속에서 가장 충격을 준 사건은 8월23일(1971년) 발생한 이른바 ‘실미도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내가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의 난동자들을 처음부터 관리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재임시의 나였기 때문이다.
1969년 1월21일(실제는 1968년임)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북한에 허를 찔린 나는 계속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보복 작전을 펴기로 하고 특공결사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박정희는 이 작전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재가를 내려 주었다.
나는 1·21 사태 직후 군 첩보부대(HID)만을 더 이상 믿고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 휘하 중앙정보부의 대북한공작책이던 제1국장 이철희를 불러 야단을 쳤다.
“귀관은 북괴가 날로 변화무쌍하게 무장공비를 남파하여 한국을 교란시키고 있는데 아무런 보복책도 강구하지 않고 도대체 무얼하고 있소? 즉시 결사대를 조직하여 HID와 협조하여 강훈련을 시키시오. 김일성의 관저와 허봉학의 대남공작지휘본부를 기습하여 묵사발을 만들어야겠오.”
훗날 김대중 납치사건의 총지휘를 했던 이철희는 당시까지는 첩보공작의 베테랑이었다. 나의 전례 없는 강경한 엄명을 받은 이철희는 우선 각군 형무소에서 사형수나 무기수로 극형에 처해져 복역하고 있던 죄수들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면 죄를 사면시켜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준다는 조건을 붙여 결사대를 선발했다. 그들은 신체조건이 좋고 투쟁심도 강하지만 어쩌다 잘못 풀려 무거운 죄를 짓고 내일의 희망이 없이 복역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인생과 장래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되는 자포자기적인 투혼에 불타고 있던 무리들이었다.
훈련은 HID 대장 준장 조천성이 담당하고, 훈련에 필요한 특수장비를 조달하고 급식 및 훈련에 필요한 경비를 중앙정보부가 담당하였다. 우리는 훈련 장소로 서해안에서 적절한 무인도를 발견하여 그들을 수용하였는데 그 섬이 바로 실미도였다.
우리는 실미도에 특수 훈련 장소를 개척, 김일성의 관사와 허봉학의 대남공작지휘본부의 모형을 가건축해 놓고 6개월 간의 맹훈련에 들어갔다. 이들 결사대는 평양 투입시 완전히 북한 인민군의 복장으로 가장하기로 했으며, 이들의 공수 작전을 미 CIA가 책임져서 낙하산 투입을 기도하는 한·미 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나는 특공결사대의 훈련 상황을 수시로 조천성과 이철희를 통해 보고받았다.
1969년 5월 하순 어느날이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들어서자 날씨가 이만하면 결사대가 야영을 하는 경우에도 얼어죽지는 않겠다고 판단하고, 만반의 준비 후에 박정희를 방문하여 평양에 결사대 투입 준비완료를 보고했다. 처음에는 그다지도 열렬한 관심을 보이던 박정희가 웬일인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정희는 그 때 이미 평양당국과 비밀 교섭을 모색하고 있었다. 내가 준비완료를 보고한 지 이틀 후에 훈련 담당자 조천성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코가 쑤욱 빠져 돌아왔다.
“각하가 별명이 있을 때까지 보류하고 계획을 연기하라는 지시입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각하.”
“이것 봐, 김부장. 만약 그들이 우리의 기습작전에 보복을 해오는 경우 우리에게는 계속 투입할 병력이 없지않나 말이야.”
“얼마든지 보충병력이 있습니다. 이번에 그자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국민들의 사기에도 영향이 많습니다.”
“그 뜻 알겠어. 그러나 보류하자고. 내 말 알겠소?”
그런 일이 있은 지 네댓 달 후에 나는 중앙정보부장직을 물러남에 따라 실미도에서 훈련중이던 결사대에 대해서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어정쩡한 상태에서 다시 죄인 취급을 하고 그들에게 지급되던 특수부식마저 중간에서 떼어먹어 불만이 누적된 것으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잘 훈련된 그들을 관리하는 데 너무 소홀한 것이었다. 그래서 불만이 누적된 특공결사대는 평양의 김일성 관저를 습격하는 대신 청와대와 중앙청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폭의 길을 택하고 만 것이었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정부가 국가 안전정책 일반에 걸쳐 얼마나 무정견하고 철저하지 못하는가를 단적으로 노출시킨 데 있다. 사태 수습 과정에서도 정부 당국자 간에 발표 내용이 다르고 끝까지 국민을 속이려 들었다. 무장공비도 아닌 자기 나라의 특공결사대에 의해 수도 서울이 대낮에 난장판이 되고 청와대가 위협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인하여 정부의 총력안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술한 입방아에 불과한 것이었나를 자인하고 만 결과가 되었다.
윤길주 월간중앙 기자
yk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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